황 소
유년시절 우리 집 황소는 재산목록 1호였다. 농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논과 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그런 힘든 일은 소가 도맡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소는 식량을 제공하고 재산을 불리는 부의 상징이 되었기에 가족처럼 보살피며 정성을 들여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귀찮은 존재였다. 겨울이면 소죽 쑤는 일과 여름방학이면 꼴을 먹이는 일이 내 담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 역사에서 농경문화에 제일 크게 기여한 동물을 꼽으라면 단연, ‘소’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4,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는 오래전부터 인류와 함께하면서 농업혁명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길들여진 소를 활용하여 인간의 노동력 몇 곱절이나 되는 일을 하면서 생산성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우유와 고기를 제공하고 가족의 대소사大小事를 치르고 재산을 늘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 쇠가죽과 심지어 소의 우분牛糞도 최상의 퇴비로 활용될 정도로 버릴 것 하나 없는 소는 인간을 위해 귀한 것들을 제공하는 존재였기에 소중히 거둬야만 했다.
나는 소 때문에 친구들과 놀고 싶을 때 놀 수가 없는 것이 불만이었다. 무더운 여름 소꼴을 먹이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비오는 날보다 나았다. 비가 오면 쉴 것 같지만 비옷을 입고 망태를 메고 소가 먹을 풀을 베어 와야 하는데 비오는 날 소꼴을 베려가는 것은 제일하기 싫은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오히려 추운 겨울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겨울에는 준비되어있는 소여물을 끓이기만 하면 되었다. 볏짚을 썰어서 마른 고구마 줄기와 쌀겨를 버무려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가마솥에 넣고 끓이면 그만이었다.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일이 내 차지였는데 추운 겨울날 솔가지로 불을 지피는 것이 여름날 소 풀을 먹이는 것보다 나았다. 불을 지피고 나서 불이 사그라질 때쯤 고구마 몇 개를 구워서 밤에 간식으로 꺼내 먹는 재미가 쏠쏠하여서 겨울은 그럭저럭 지낼 만 하였다.
동장군冬將軍이 물러나고 봄이 오면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이른 봄이 되면 들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데 겨우내 끊인 죽만 먹고 자란 소에게 봄의 기운을 돋우기 위하여 아버지는 이른 아침 곤한 잠을 깨우셨다.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어스름한 새벽에 외양간의 소를 내어 몰고는 풀을 먹이려 나셨다. 아직 추위가 덜 가신 들판에는 하얀 서리꽃이 피어 손발이 시리고 추웠다. 한 시간 넘게 발을 동동거리면서 소꼴을 먹이는 일은 어린 나에게는 여간 큰 고역이 아니었다.
해가 떠오르면 서둘러 소를 끌어다 놓고 학교에 가야하는데 소는 겨우내 여물만 먹어서인지 새로운 땅 기운을 받고 나온 새싹 맛에 정신없이 뜯으며 도시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의 고삐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잡아당겨 보돕시 끌고 와 외양간에 매어 놓고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십리 길을 부리나케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루는 시냇가의 미루나무에 고삐를 매어 놓고 친구들과 물장난을 치며 고기잡이를 하며 노는데 정신이 빠졌다. 그 사이에 소들끼리 싸워 사고가 나고 말았다. 하필이면 우리 소에게 고삐 풀린 상대소가 달려와서 싸움이 붙었는데 우리 소는 고삐가 매어 있어서 제대로 대항을 못하다가 그만 한쪽 뿔이 빠지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린 나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한동안 멍한 상태에 있었다. 양쪽의 뿔이 그렇게 멋지고 위엄이 있었는데 피가 범벅이 되어 한쪽 뿔이 없는 소는 기괴할 정도로 이상하게 보였고 나는 결국 놀라서 주저앉고 말았다. 큰 눈망울에 눈물을 흘렸던 소를 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소를 몰고 집으로 가야할지 겁이 났다.
나는 맥이 빠진 상태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외양간에 매어 놓고 저녁도 먹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를 않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밥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서 종일 친구들과 있다가 밤이 깊어 잠자는 시간에야 들어 왔다. 하지만 부모님은 종일 들어오지 않은 자식이 걱정이 되었던지 기다리고 있었고 오히려 놀란 나를 걱정하고 계셨다. 마음의 안정은 되었지만 소만 쳐다보면 그 멋진 놈이 왜 그렇게 밉게 보이던지…….
아침에 아버지께서“다음 장날 소를 내다 팔아야 하니 잘 먹여야 한다.”는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난 장날 소를 팔기 위하여 소 전(廛)에 갔었는데 생각보다 기대했던 금액이 나오지 않자 다시 몰고 와서 한 보름 잘 먹여 소전에 다시 내겠다고 하였는데 한쪽 뿔이 없어서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돈이 필요하였지만 소 뿔 때문인지 내지 못하고 한참을 두었다가 어쩔 수 없다면서 어느 장날 소를 팔고 오셨다. 그날 밤 뿔 하나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하시면서 허탈하게 웃으셨다. 농촌에서는 황소가 큰 자산이었다. 소가 없는 이웃에게는 소를 빌려주기도 하였는데 소를 하루 빌려 쓰면 이삼 일간 노동으로 품을 갚기도 하였다.
소도 일을 부리기 위해서는 송아지 때부터 길을 들여야 했다. 그리하여 송아지의 골격과 식성을 보고 일을 잘 할 것인지를 판단을 하여 일소로 정하였다. 그리고 송아지는 적정한 시기에 이르면 코를 뚫어 코뚜레를 끼웠다. 그래야 큰 덩치의 소를 쉽게 몰수가 있기 때문이다.
송아지의 코뚜레를 끼우는 날은 사람의 성인식을 치르는 것처럼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였다. 코뚜레로 쓰기에 좋은 것은 노간주나무인데 나무껍질을 벗기면 표면이 매끄럽고 탄력이 좋아 코뚜레로는 최상이었다. 아버지는 노간주나무를 보면 가느다란 가지를 취하여 원형으로 잘 휘어잡아 미리 코뚜레를 만들어 놓으셨다. 코를 뚫기 위하여 한쪽 끝을 뾰쪽하게 다듬은 나무 송곳을 불에 달구어 양쪽 코 사이의 부드러운 곳을 순식간에 힘을 주어 코를 뚫어 코뚜레를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련하여 송아지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데 나도 모르게 따라서 눈물이 고였다.
일 년이 지나면 일소로 길들이기 위하여 훈련을 시켰다. 코가 꿰어서 이리저리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일을 시키기 위해서는 멍에를 씌워야 했다. 소 목덜미에 멍에를 씌우고 목덜미가 굳어져 주먹만 한 혹이 생길 정도가 되어야 무거운 짐을 끌 수 있기에 계속 훈련을 시켰다. 소가 무거운 짐에 적응이 되고나면 쟁기질을 시키는데 웬만한 소들은 적응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노련한 조련사가 필요하였다. 아버지는 소를 하도 많이 다루어서 요령껏 달래가면서 빠른 시간에 일소를 만드셨다. 소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몇 가지 언어로 가자를, ‘이라.’ 세울 때는 ‘워.’ 우측으로는 ‘이리.’ 좌측으로는 ‘저리.’ 하면서 기본적으로 소와 소통할 수 있는 몇 가지 언어를 주입시키면서 훈련이 끝나야만 진정한 일소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세계 최대의 금융 중심가인 뉴욕의 맨해튼에는 자본주의의 경제가 총집합 되어 있는 월스트리트라는 증권가가 있다. 이곳에는 우람하고 기백이 넘치는 황소상이 있는데 이 황소상은 월가를 상징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도 황소를 부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 황소 동상은 많은 관광객들이 에워싸 황소의 주요 부위를 만지면 부가 이루어진다는 속설에 많은 사람들이 부를 일구고 싶은 소망에 소의 그곳을 만지기 위하여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있다. 관광객들이 하도 만져 그곳이 광채가 나서 정말 번쩍이는 황금처럼 되어 있었다.
어느 국가는 소를 신처럼 대하기도 한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화폐에 소가 등장하는 것은 소에 대한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국가들이 소를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인간의 먹거리를 위하여 각 지역마다 소고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 지역의 숯불고기 거리에는 수많은 소의 조형물이 있는데 부자연스런 모습이 눈에 거슬리면서 씁쓰레한 생각이 든다.
화가 이중섭은 황소 그림은 통해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나타내었다. 불꽃같은 황소는 금방이라도 뛰어나와 불의한 세상을 걷어차 버릴 것 같고 정의를 외칠 것만 같다. 소는 일을 할 때가 가장 소다운 모습이고 아름다웠다.
소처럼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는 세상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