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녁에는 Jul 23. 2023

첫 면접교섭과 시어머니

그래도 아이의 할머니이니까요.

오랜 출장을 다녀온 아빠처럼


2주에 한번 면접교섭을 갖기로 했다. 남편은 마치 오랜 출장에 다녀온 아빠처럼 2주에 한번 집에 와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다가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부모님은 아예 집에 들이지 마라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좀 시간이 필요한 것같았다.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아빠는 열네 밤 자야지 만나는 거야' 원래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집에 없던 아빠였기 때문인지 아들은 아빠 없는 집이 크게 낯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첫 면접교섭날 남편은 아이와 함께 키즈카페에 다녀왔고 나는 저녁으로 백숙을 준비했다. 초복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저녁을 먹었고 남편과 아이는 목욕놀이를 했으며 10시쯤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가 잠들자 남편은 한 때 자신의 방이었던 맨 끝방으로 갔다. 이혼 전 우리 집 저녁풍경과 똑같은 날이었다.


다음 날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아이 등원을 시켰다. 출근을 하려는데 남편이 베란다에 있던 바람 빠지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자전거 두대를 차에 싣는다.

'고치려고?'

'응'

'그래 고쳐서 당근마켓에 팔아버려. 팔아서 용돈해' 무심하게 한마디 던지고 출근했다.

남편은 저 자전거가 어떤 자전거인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결혼 1주년 때 부모님이 축하한다며 50만 원을 주셨고 우리는 그 돈으로 자전거 두대를 샀다. 우리는 그 자전거를 타고 그 해 여름 정읍 옥정호에서 시작하여 광양 배알도까지 섬진강 일주를 했다. 가끔 강변에 한두 번 타고 나간 것 외에는 꽤 오랜 시간 바람 빠진 채로 베란다에 방치된 자전거 2대. 이제는 타는 사람도 없고 흉물스럽게 변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저렴이 자전거지만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산 추억 있는 자전거라 새집으로 이사할 때에도 꾸역꾸역 싣고 온 자전거였다. 남편은 그 자전거를 이제야 고치겠다고 차에 싣고 있다. 무슨 생각일까.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보니 자전거가 1대밖에 없다. 바람도 빵빵하게 넣었고 먼지도 깨끗이 닦아내 바로 타고 나가도 좋은 상태인데 짝을 잃고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남편은 자기 몫의 자전거를 싣고 떠났나 보다. 애써 무시하고 돌아선다.


시어머니와 마무리 짓기


지난 6월, 남편은 두 번째 면접교섭 때에는 아이를 데리고 2박 3일 어머니댁에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다만, 그전에 어머니를 찾아뵙고 우리가 이혼했다는 것과 이혼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라고 했다. 남편은 얼마 뒤 어머니께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전화로 '다 이야기했다'라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과연 '다 이야기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남편에게 추궁할 일은 아니었다. 곧 알게 될 수도 있다. 정말로 어머니가 남편에게서 이 이혼의 전말을 모두 들었다면 가만히 있을 분은 아니니까. 전화는 아니더라도 장문의 카톡 정도는 남기실 분이고 그러면 나는 남편이 정말 '다' 이야기했는지 아닌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꽤 오랜 기간 동안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그 사이 친정엄마는 시어머니에게 연락해서 이야기를 해라. 아가씨한테라도 전화해서 이야기해라 보챘지만 '엄마 그냥 내버려 둬요.'라고 했다. 친정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7월 초에 또 전화해서는 '시어머니한테 전화는 해봤냐'라고 해서 급기야 화를 내버렸다. '엄마 그거 그만 물어보라고 했잖아. 시어머니한테 할 말 있으면 엄마가 직접 하시든가요' 엄마는 알겠다고 하고 화제를 돌렸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그날이 시어머니의 생신날이었다.


며칠 뒤 시어머니한테 장문의 카톡이 왔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전화하여 자세한 이야기는 않고 여자문제로 이혼하게 되었다며 펑펑 울었다고 했다. 자신이 아들을 잘못 키웠나 보다며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어찌 저런 아들이 나왔을까.


예전에 어머니와 그저 대화하다가 '어머니, 오빠가 물건 사는 걸 참 좋아해요. 백화점 이런 데 좋아하고요.'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창 남편의 돈 씀씀이가 못 마땅할 때여서 시어머니 앞에서 남편 핀잔을 준 것이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 '미안하다. 내가 잘못 키워서 그래. 얘 어렸을 때 시아버지가 바쁘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얘를 데리고 백화점에 자주 드나들었어. 어렸을 때 그런 습관이 남아서 그런가 봐'라고 하셨다. 말을 꺼낸 내가 머쓱해질 만큼 어머니는 말씀도 참 배려있고 곱게 하셨다. 남편이 말솜씨만은 어머니를 닮았고 나는 남편의 고운 말을 좋아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랑은 결혼해서 싸울 일이 있어도 큰 싸움이 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결혼해 살면서 우리는 큰소리 내며 싸운 적이 거의 없다.


어머니가 보낸 장문 카톡의 수많은 낱말 중에 내 신경이 꽂힌 것은 '자세한 이야기는 않고'였다. 결국 남편은 어머니에게 이혼의 자세한 이야기와 전후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전화하려 했으나 남편이 아내가 힘들 것이라며 전화하지 마라고 말렸다는 말도 전해주셨다. 우리 이혼의 많은 이야기를 단순히 '여자문제'라는 4글자로 간단 요약해서 전달해 놓고 '다 이야기했다'라고 나에게 말한 남편의 용기와 지혜는 어디서 나온 걸까. 물론 나도 친정부모님께 남편의 낯 뜨거운 여자 문제를 말하지는 않았다. 부모라고 해서 모두 필요는 없고 내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전달해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여자문제'라고 4글자로 요약할 문제는 아니지 않나. 그래놓고 나한테는 '다 말했다'라고 하다니...


시어머니의 카톡에 답장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고민 끝에 어머니께 남편이 하지 않았다는 '자세한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어머니는 남편이 정말 미친놈이라며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다 내 자식이지만 정 떨어진다고 하셨다. 다 쓴 것도 아니고 몇 개만 육하원칙에 따라 알려드린 것뿐인데... 어머니는 긴 장문 끝에 나를 딸같이 생각했으며 나와 아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예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주로 대화의 끝에 기도하겠다는 말이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등장했다. 이것은 대화의 종결어미와도 같다. 기도하겠다는 그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나는 시어머니의 카톡에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비록 이야기 끝에 남편을 탓하시고 나를 감쌌으나 이제 나와 시어머니는 남이고 시어머니와 전. 남편은 여전히 엄마와 아들이다.


'어머니 건강하게 사세요. 남편과 제가 이혼했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제 아이의 할머니입니다.'


이전 07화 이혼하고 열흘이 지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