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내 이혼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와 나는 가깝지 않다.
엄마와 나는 둘 다 성격이 곰살맞지도 애교스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서로를 미워하거나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간 감정이나 일상의 교류가 없는 편이다. 엄마와 둘이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어색하다. 임신 막달에 친정에 내려가 있을 때 엄마와 둘이서 시내에 나갔다가 피자가게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엄마가 그런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날 나는 피자가게에 처음 와본 사람처럼 모든 것이 어색했다. 그래도 요즘엔 아기가 생기고 친정에 자주 가게 되면서 예전보다 나아진 편이다.
엄마는 감정기복이나 표현이 크지 않았고 늘 그린 듯 그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해내는 분이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가 무디다고 타박했다. 아빠는 잘 생겼고 딸에게 관대했으며 새벽밥 먹고 출근하는 생활력 강한 가장이었지만 술을 많이 드셨고 늘 밥상머리에서 음식이 짜다고 엄마를 탓해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부부 싸움을 할 때면 물건을 집어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싫었고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이 40을 먹고 보니 나나 엄마나 비슷한 성향인 것 같다. 다소 곰 같은 성격.
그런 엄마가 왜 하필 이때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는 걸까. 6월 중순 경 협의이혼 재판일이 얼마 남지 않았고 상간녀에게 위자료청구 소장이 발송된 그 주 주말이었다. 일이 바빠 부모님이 아기를 봐줄 겸 잠깐 집에 와계셨다. 아빠는 거실에서 주무시고 안방에서 엄마와 내가 아기를 사이에 두고 막 자려던 참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요새 이상하다고 했다.
아빠가 수상하다.
아빠는 작년 말부터 집에서 3시간 넘게 떨어진 지역에 일을 하러 가셨다. 건설일을 하는 아빠는 동료들과 종종 타지에 숙소를 잡고 몇 개월씩 일하는 경우가 있었다. 엄마 말은 아빠가 그 지역에서 만난 여자와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것이다. 꼭 새벽 6시가 되면 바람 쐬러 간다며 집 밖으로 나갔다 오고 분명 아침저녁으로 둘이 통화를 하는 것 같은데 통화 기록이 삭제되어 있으며 종종 차에 뭘 두고 왔다는 핑계를 대며 나가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온다는 것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도 스치는 게 있었다. 전날 오후 아빠, 나, 아기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는데 아빠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는 핸드폰을 들고 맨 끝방, 예전 남편방으로 문을 닫고 들어갔는데 전화를 받는 폼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말투도 어색하고 전화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아빠의 평소행동과 다르다.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다.
또 있었다. 아빠가 타지에서 일할 때 저녁에 종종 영상통화를 해서 아기를 보여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커피숍이라면서 인자하면서도 꾸민듯한 미소를 띠면서 전화를 받는데 평소와 다르게 자꾸 전화를 급히 끊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다른 동료들끼리 있을 때에는 손주랑 통화하는 것을 자랑삼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을 개의치 않았던 아빠였다. 그날 영상통화에서 보였던 커피숍의 꽃무늬 소파가 매우 수상하다.
엄마는 아빠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며 너희 아빠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아빠가 그때도 다른 지역에서 일할 때 만난 여자가 집 근처까지 찾아와서 집으로 전화를 했고 엄마가 화가 나서 그 여자가 묵고 있던 모텔까지 쳐들어갔으며 아빠가 여자랑 낚시를 다녀온 것을 알고 대문 앞에서 아빠를 기다렸다가 아빠 앞에서 소주 병나발을 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또 이런다며 요즘 계속 마음이 불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니 이제 타지 일도 끝났고 집으로 내려왔으니 정리되겠지라고 했다. 다음 날 아빠는 새벽 6시부터 고향집으로 내려가겠다며 서둘렀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며칠 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아침부터 A 씨를 만나러 간다며 나갔는데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A 씨가 아니라 그 여자를 만나러 간 게 분명하다고 했다. 엄마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간 후 아빠가 보는 앞에서 핸드폰을 뺏아 그 여자의 연락처를 지워버렸는데 아빠는 그 모습을 보더니 '딸한테 단단히 교육을 받고 왔나 보구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딜 나가서 연락조차 안 되니 이를 어쩌면 좋냐는 것이다. 아빠가 내일부터는 새로운 곳에 일을 하러 가야 하니 오늘 시간을 내 그 여자를 만나러 간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 가까이를 이야기하다 엄마는 제풀에 지쳐 전화를 끊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목전에 둔 딸이 아빠의 외도를 대하는 심경
처음에는 엄마가 아빠의 외도 이야기를 나에게 꺼낸 목적이 뭘까 생각했다. 이혼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인가? 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도의 증거를 잡게 도와달라는 말인가? 네 아빠도 이렇게 개차반이니 이혼을 다시 생각하라는 말인가? 그냥 그런 일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엄마가 그 문제로 힘드니 위로해 달라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지금 왜 하는 거야?라고 묻기도 어려웠다. 왜냐면 그것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공격적으로...
'내 바람난 남편과 비등한 자가 우리 아빠라니 그것도 현재 진행형이라니... 엄마는 이혼을 목전에 앞둔 나에게 꼭 그런 심란한 말을 해야 했을까.'라는 게 내 첫 심정이었다. 예전의 엄마와 나 사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이야기임은 분명했다. 둘의 성격에 비추어보아도 그러하다. 엄마는 아빠가 그 여자랑 살림을 차려 집을 나갈 정도가 되어야 이야기할 사람이다. 갑상선암 수술이나 담석제거 수술을 받을 때, 다리에서 떨어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교통사고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받을 때에도 엄마는 연락 한번 하지 않아 나는 항상 나중에 아빠나 친척분들 입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이혼에 대한 모든 준비와 결정을 마치고 이야기를 꺼냈듯이 엄마도 그 정도의 준비와 결정은 마치고 나에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거 아닌가? 엄마, 이건 지금까지 40년 간 우리가 해왔던 대화 패턴에 맞지 않잖아. 엄마는 딸이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게 되자 갑자기 친근함과 연대감이 생긴 걸까. 엄마는 엄마와 나 사이에 어떤 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했을까?
두 번째 심정은 '사위가 직장동료랑 바람나서 딸이 이혼을 하는 마당에 아빠는 그러고도 그 짓을 계속하고 싶을까?'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빠가 5월 초 사위의 외도 소식을 접했을 때 했던 여러 가지 말 중에 하나는 '그걸 빨리 정리 못해서 여기까지 와?'였다. 그때는 사위가 오랜 시간 외도를 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빠는 그 뒤에도 종종 통화할 때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 그 말을 두 번 정도 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빠가 생각하는 외도의 기준이었던 것 같다. 잠깐 만나고 빨리 정리했다면 외도가 아니고 그것이 오래가면 외도! 그래서 본인은 잠깐 일할 때 만났다가 지역을 옮기거나 고향으로 돌아오면 그 관계는 정리하니까 외도는 아니다? 아빠가 사위에게 화가 난 지점은 사위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점이 아니라 다른 여자를 길~고 오~래 만났다는 점이었다보다.
이어지는 생각은 '그래서 엄마가 아빠랑 이혼을 한다고 하면 나는 이혼을 하라고 해야 할까 그냥 넘어가라고 해야 할까'였다. 이혼을 하겠다고 하시면 반대할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가도 부모 이혼 이후의 삶을 그려보면 이혼을 하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보다는 내가 부모로부터 잃게 되는 것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이혼을 하면 내가 돌아갈 친정이 없고 함께 부모님과 여행을 갈 수도 없으며 만약에 두 분 중에 한 분이 재혼이라도 하면 그 낯섦과 어색함은 또 어떻게 하나.
우리 부모의 이혼에 대한 고민 끝에는 내 아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 아들은 부모의 이혼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들이 많은 것을 잃거나 경험할 수 없게 될 것임에도 이혼을 선택했던 나를 이해해 줄까.
아빠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일을 나가기 시작하자 엄마의 푸념 섞인 전화는 더 이상 없었다. 아빠가 그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한 건지 아직 진행 중인데 엄마가 더 이상 말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엄마는 모른 채 아빠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계속하는 중인지 어찌 정리되었는지는 모른다. 그 뒷 이야기는 나중에 친정에 가서 막걸리 한잔 마시며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