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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

30년을 지나 돌아온 웃음

by 쉼표

프롤로그: 30년 뒤의 기억

그날의 웃음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몸속 어딘가에, 깊이 묻혀있던 웃음. 절망 속에서도 솟아올랐던 웃음. 30년을 세월처럼 흘려보냈는데도,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웃음.

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글을 쓰면서, 그 웃음이 다시 떨리고 있다. 30년을 지나 돌아온 것처럼.


따뜻한 노란빛 배경 위에 붓글씨로 쓴 '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

내 속에 창자가 웃던 날 - Image 2025년 11월 20일 오후 06_04_33.png 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

서예가의 붓끝에서 태어난 '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

30년을 건너온 신체적 기억을 따뜻한 노란빛으로 감쌌습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울려 나오는 웃음에 대한 이야기.


몸이 기억하는 절망

감정은 뇌에만 살지 않는다.

슬픔은 목에 걸린다. 기쁨은 손끝에서 떨린다. 그리고 어떤 웃음은 창자 깊숙이 묻혀 있다가, 30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

그날을 기억할 때, 나는 감정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이 문장은 거짓이다.
"그때는 절망했어"—이것도 불충분하다.

그날을 말하려면 몸의 언어를 써야 한다.

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

그 웃음은 상황이나 누군가의 말이나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원초적인 것이었다. 삶 자체에 대한,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웃음. 절망의 저 밑바닥에서 한 번 터져 나온 웃음.

그 웃음을 들었던 날,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살아있다.


엄마의 시간

엄마를 잃었다.

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나신 엄마와의 소중한 시간들이, 이제는 내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 상실의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알고 있다:

엄마를 잃은 일은, 나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절망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알게 했다. 그리고 그 깊이에서도 웃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문장을 다 쓰고 나면, 가슴이 떨린다.

그것은 감정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30년 전의 웃음을 다시 소환할 때, 내 몸은 정직하게 반응한다. 창자들이 울린다. 뼈가 떨린다. 피가 빨라진다.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기억은 뇌의 작업이 아니다. 기억은 신체적 경험이다. 내 몸은 나의 역사다. 내 창자는 내 영혼이다.


상실이 말이 되는 방식

이제는 누군가의 시간이 되어주고 싶다.

누군가의 하루 속에 잠시 머물다,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문장 한 줄로 남고 싶다.

왜인가?

왜냐하면 나도 누군가의 글에 의해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절망의 밤을 지새우던 시절, 한 문장이 나를 붙들었다. 그 문장이 없었다면, 나는 어디까지 떨어졌을지 모른다.

상실은 우리를 침묵에 빠뜨린다.

하지만 상실을 깊이 있게 경험한 사람이라면, 또 다른 일이 일어난다. 침묵 속에서 천천히, 말이 피어난다.

그 말은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잃은 것들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엄마를 잃었다. 그 상실은 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그 상실을 언어의 형태로 건사한다. 마치 표본을 만들 듯이.

그리고 그렇게 변환된 상실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 누군가의 슬픔과 만나고, 누군가의 절망과 마주친다.

상실의 기억이 아름다운 언어가 되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될 때—

그제야 비로소 상실도 의미를 가진다.


살아있음의 증거

비몽사몽 간, 내 속의 창자들이 웃고 있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30년 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면서 다시 그 웃음이 울린다. 마치 한 번 울렸던 종이 다시 울리는 것처럼.

그 웃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망 속에서의 웃음이 아니라, 절망을 통과한 영혼의 웃음이다. 상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상처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웃음이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 뒤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시간은 우리를 지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를 통과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깊어진다.

상실도 통과한다. 절망도 통과한다. 그 모든 시간이 우리를 통과할 때, 우리는 변한다.

그리고 변한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것을 경험했고, 그것 속에서도 웃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누군가의 시간이 되기 위하여

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

그 웃음은 죽지 않았다. 30년을 지나 다시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을 통해, 내 글은 누군가의 밤을 밝힐 것이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으면서 울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 속에서도, 그들은 듣게 될 것이다:

당신도 살아있다. 당신의 창자도 웃을 수 있다. 그 웃음이 바로, 당신이 절망을 통과했다는 증거다.

시간은 나를 지나간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시간이 되고,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버텨준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웃음을 전해준다.


당신의 시간은 어떤 얼굴로 다가왔나요?

'내 속에 창자들이 웃던 날'을 댓글로 나누어주세요.

당신의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의 웃음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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