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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 아버지의 기록』 시리즈 제3편 -청운의 바람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

by 쉼표


프롤로그


일곱 살부터 열두 살까지,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언덕.


그곳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


어린 시절엔 그저 나무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 깨달았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아버지였다는 것을.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지 않고,

비에 젖어도 흔들림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


아버지가 남긴 청운(靑雲)이라는 이름은

푸른 바람이 되어

지금도 그 나무를 감싸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청운 3부작, 마지막 장.



석양이 지는 언덕 위에 우뚝 선 소나무와 푸른 바람의 소용돌이, 아버지의 청운을 상징하는 동양화

청운 아버지의 기록 3편-청운의 바람 --A soft, poetic thumb.png 그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황혼의 언덕 꼭대기에 뿌리 깊게 선 소나무 한 그루. 나무 주변으로 청운을 상징하는 푸른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멀리 바다 위로 석양이 내려앉는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나무는 아버지를, 바람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청운의 정신을 표현한 한국 전통 수묵화풍 일러스트



일곱 살부터 열두 살까지, 5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그 언덕.


나는 종종 그 언덕을 떠올린다.


내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아무 말 없이 나를 부르는 장소.


어린 날부터 수없이 오르내렸던 길이고,

아버지를 배웅하던 마지막 길이기도 했다.


언덕 아래 왼편에는 늘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벼들이 잔잔한 파도처럼 흔들리고,

그 너머로는 낮게 내려앉은 바다가

천천히 숨을 쉬듯 일렁였다.


오른편은 산이 감싸 안고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마을이 다정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순간을 건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언덕의 꼭대기,

바람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스치고

저녁노을이 가장 먼저 내려앉는 자리에는

우뚝 선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늘 그곳에 있었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도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을 때도,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그날에도.


그때는 몰랐다.

그 나무가 왜 그렇게 자꾸만 마음에 남는지.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나무는

그저 나무가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51세에 '청운'이라는 이름을 지으셨을 때,

나는 열두 살이었고,

그 나무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다.


마치 아버지보다 먼저 그 자리를 지키며

아버지의 청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지 않고,

비에 젖어도 흔들림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


삶의 고단함을 말로 표현하지 않던 사람.


그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가족이라는 땅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사람.


나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말 대신 등으로 이야기하던,

조용하지만 깊은 사람.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의 그 언덕은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감정과 마주했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바람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바람의 이름이

바로 청운(靑雲)이었다.


푸른 청춘의 기운을 모아

하늘로 띄운 이름.


그 이름을 아버지는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어린 날의 나는

아버지의 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멋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버지는 이루지 못한 꿈과

말하지 못한 열망,

말 대신 꾹꾹 눌러 담은 감정들을

모두 그 두 글자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스물셋에 '푸름 구름'이라는 닉네임을 골랐던 것도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2007년 겨울,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청운 아래

나도 모르게 푸른 바람을 따라간 것.


어쩌면 그때부터

아버지의 바람이 내 삶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마음속 언덕 위에 다시 선다.


바람결이 지나가고,

나무가 조용히 흔들리고,

노을이 서서히 고개를 기울이는 자리.


그 순간,

나는 바람 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느꼈을 바람,

청춘의 온기,

말하지 못해 가슴에 남겨두었던 꿈들이

부드러운 결로 스며든다.


아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분의 청춘은 청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지금도 나를 감싼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을 받아

오늘의 문장을 쓴다.


바람결에 다시 만난 청운.


그 바람은

언덕의 나무를 흔들고,

내 언어가 되어 흐르고,

언젠가 또 다른 이름으로 이어질 것이다.


청운은 끝나지 않았다.


푸른 구름은

지금도 저 하늘 어딘가에

조용히 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아버지가 남긴 바람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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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운 시리즈 다시 읽기**


**제1편** [푸른 구름의 언덕](링크)

마음은 늘 그 곁에 머무릅니다

→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5년의 기억, 그 언덕에서의 이야기


**제2편** [청운(靑雲)](링크)

나는 아버지의 언어에서 태어났다

→ 청운에서 푸름 구름으로, 세대를 잇는 언어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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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3부작을 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그분을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만큼이나

이 이야기를 꺼내는 데도 긴 여정이 필요했습니다.


1편에서 우리는 언덕을 걸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5년의 기억,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2편에서는 이름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의 청운이 내 안에서 푸름 구름이 되고,

다시 쉼표가 되기까지의 무의식의 여정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3편에서는 언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 서 있던 나무가 사실은 아버지였다는 것을,

청운이라는 바람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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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청운은 계속된다**


아버지는 51세에 붓을 들며 '청운'이라는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푸를 청, 구름 운.

푸른 청춘의 기운을 모아 하늘로 띄운 이름.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이름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언덕 위 나무를 흔드는 바람으로,

내 글 속에 흐르는 언어로,

언젠가 또 이어질 이름으로.


사람은 떠나지만

그 사람이 남긴 바람은

형태를 바꿔 계속 머뭅니다.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모든 분들에게,

아직도 그 사람의 곁에 머물고 있는 마음들에게,

이 3부작을 전합니다.


마음은 늘 그 곁에 머물러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미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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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靑雲) → 푸름 구름 → 쉼표


세대를 잇는 언어의 계보는

이렇게 하나의 원을 그리며

다시 언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지금도 계속 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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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의 청운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따뜻한 바람으로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2025년 11월

베트남 다낭에서,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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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 아버지의 기록』 3부작 완결]**


제1편 푸른 구름의 언덕 (11/25)

제2편 청운(靑雲) (11/27)

제3편 청운의 바람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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