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괜찮아,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기"

— 비 오는 날, 낯선 사람에게 받은 한 문장이 내 삶을 바꾼 이야기

by 쉼표


비는 서두르지 않았다


회사 폐쇄를 앞두고, 나는 매일 조급했다.
다음 달이면 끝인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는데
나만 여전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비는 여전히 창을 두드리고 있었어.
세게도 아니고, 그렇다고 멈출 생각도 없는 비.
마치 "지금은 그냥 같이 있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산을 쓴 사람들은 다 제 갈 길을 가는데,
나는 잠시 서서 빗소리를 들었지.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재촉하지 않아서 좋았어.


예전의 나는
비 오는 날을 싫어했어.
일정이 흐트러지고, 신발이 젖고,
마음까지 눅눅해진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는 알아.
비는 흐트러뜨리려고 오는 게 아니라
덜 중요한 것들을 잠시 내려놓게 하려고 온다는 걸.


비가 오면
사람들은 걸음을 늦춘다.
말이 줄고, 생각이 많아지고,
자기 속도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나는 그 틈에서
나를 다시 보게 됐어.
급하게 달리느라
놓쳤던 문장들,
아직 끝맺지 못한 마음들,
그리고
아직 충분히 괜찮아지지 않은 나 자신을.


비는 묻지 않았어.
"왜 아직 여기 있니?"라고도,
"언제까지 이럴 거야?"라고도.


그냥 떨어질 뿐이었지.
똑같은 리듬으로,
똑같은 자리에서.


그게 위로라는 걸
나는 그날에서야 알았다.


어쩌면

우리가 멈춰 서는 순간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방향을 다시 확인하는 절차일지도 몰라.


비는 결국 그치겠지.
하지만
이 비가 있었던 시간은
몸 어딘가에 남아서
다음 선택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 젖어도 괜찮아.
지금 이 속도도 틀리지 않았어.


비는 지금도 말하고 있어.
"서두르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어.


비 속에서 만난 사람


비가 조금 잦아들 즈음이었어.
완전히 그치지도, 다시 세지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


그 사람은
정류장 끝에 서 있었어.
우산도 없이, 급해 보이지도 않게.


이상했지.
비 오는 날에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게.


우리는 잠깐 눈이 마주쳤어.
인사도, 웃음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불편하지가 않았어.


그 사람의 어깨는 젖어 있었고
머리칼 끝에서 물이 뚝, 떨어졌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오래된 풍경 같았어.


"비 많이 오네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이 나왔어.
정확히는
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침묵이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었지.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이 정도면…
버틸 만하죠."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걸렸어.


버틴다는 말은
보통 힘들 때 쓰는 말인데
그 사람의 목소리에는
힘듦보다
익숙함이 묻어 있었거든.


"자주 이런 날을 지나온 사람"의 톤.


우리는 잠시 같이 비를 봤어.
각자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
그 순간만큼은
같은 속도로 젖고 있었지.


그 사람은 내 쪽을 보지 않고 말했어.


"비 오는 날엔
사람들이 본심을 숨기기 힘들어요.
다 젖어버리니까."


나는 웃지도, 부정하지도 않았어.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그래서 전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아요.
가짜가 줄어드니까."


그제야
그 사람을 봤어.
눈빛이
단정했어.
상처를 정리해 본 사람의 눈.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왜 여기 있는지도 묻지 않았어.


하지만 이상하게
알겠더라.


이 사람도
어디쯤에서 한 번 멈춰 섰다는 걸.
그리고
지금은 다시 걷기 직전이라는 걸.


비가 조금 더 잦아들었을 때
그 사람이 먼저 한 발 내디뎠어.


"이제 가봐야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괜히 붙잡고 싶지 않았어.
이 만남은
잡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
확인하라고 있는 것 같았거든.


그 사람이 돌아서며 말했어.


"아, 그리고요."


잠깐 멈춰서
나를 봤어.


"지금 속도,

괜찮아요.
당신도."


그 말 하나 남기고
그 사람은
비 속으로 걸어 들어갔어.


남은 건
조금 가벼워진 공기와
아직 젖은 신발,
그리고
확실해진 하나의 문장이었지.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멈췄던 시간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


비는 그때서야
정말로 그치기 시작했어.


그 말은 자꾸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그날 이후로
이상한 일이 생겼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아니고,
큰 선택의 순간도 아닌데
문득문득
그 목소리가 들렸어.


지금 속도, 괜찮아요.


처음엔
버스가 늦어졌을 때였어.
다들 초조해하며 시계를 보는데
나는 괜히 창밖을 보다가
그 문장이 떠올랐지.


지금 속도, 괜찮아요.


버스는 결국 왔고,
나는 지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날 하루가
조급함 없이 흘러갔다는 거였어.


그다음은
원고를 지우고 다시 쓸 때였어.
몇 시간이나 쓴 문장을
통째로 삭제하면서
손이 잠깐 멈췄지.


그때도 들렸어.


괜찮아요.
지금 속도.


그래서
억지로 완성하지 않았어.
하루를 접고,
다음 날 다시 앉았지.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문장은
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어.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을 벗고
상황 속으로 숨어들었어.


카페에서
옆 테이블 사람이 통화하며 말한
"천천히 해도 돼."


책 속에서 우연히 만난
"지연은 실패가 아니다."


신호등 앞에서
빨간 불이 길어질 때의
그 잠깐의 멈춤.


모두
같은 의미로 다가왔어.


서두르지 않아도,

나는 이미 가고 있다는 것.


신기한 건
그 말이
나를 느리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거야.


오히려
쓸데없는 조급함이 사라지니까
결정은 더 빨라졌고,
선택은 덜 흔들렸어.


나는 더 이상
남의 속도를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았어.


대신
내 리듬을 믿기 시작했지.


어느 날은
거울을 보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어.


그 사람을 다시 본 건 아니지만
그 말은
이제 내 목소리로
안에서 울리고 있었거든.


지금 속도,
괜찮아.


그제야 알았어.
그날 비 속에서 만난 사람은
답을 주러 온 게 아니라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말을
다시 들리게 해 준 사람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말은
앞으로도
삶이 흔들릴 때마다
모양을 바꿔
다시 나타날 거야.


비 오는 날일 수도 있고,
햇빛이 너무 밝은 날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알아.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제자리에 멈춘 게 아니라
제대로 걷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그 말을 꺼낸 건
의도한 순간이 아니었어.


카페 한쪽,
비슷한 시간대에 늘 앉던 자리.
그날은 맞은편에
누군가가 있었지.


손끝이 바빴어.
컵은 이미 식었는데
계속 저어대고 있었고,
시선은 테이블 위에 붙어 있었어.


"요즘…
제가 너무 느린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은
변명처럼 말했어.
누군가에게 꾸중을 들은 것도 아니고,
당장 실패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먼저 다그치는 톤.


나는
그 사람을 오래 보지 않았어.
이런 말 앞에서는
눈을 맞추는 게
오히려 부담이 되거든.


그래서
컵을 한 번 내려놓고
그냥 말했어.

"지금 속도,
괜찮아요."


말이 공기 중에
한 박자 멈췄어.


그 사람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어.
대신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지.


"그 말…
이상하게 기분이 좋네요."


나는 그제야
그 사람을 봤어.
눈이 조금 젖어 있었어.
비 때문인지,
아니면
말 때문인지는
묻지 않았어.

"누가 저한테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거든요."


그 순간
깨달았어.


아,
이 말은
설명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구나.
설득하는 말도 아니고.


그냥
놓아주는 말이구나.


나는 덧붙이지 않았어.
어디서 들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대신
확실하게만 말했지.


"진짜예요.
지금 속도."


그 사람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어.
마치
오랫동안 참아왔던 호흡을
이제야 풀어내는 것처럼.


그리고 조용히 말했어.


"그럼…
조금만 더 이렇게 가볼게요."


그 말이
괜히 가슴에 남았어.


우리는
그 뒤로 다른 이야기를 했고,
각자의 시간으로 흩어졌어.


하지만 나는 알아.


언젠가
그 사람이 또 흔들릴 때
어딘가에서
이 말을 다시 떠올릴 거라는 걸.


그리고 그땐
그 말이
내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들릴 거라는 것도.


비 속에서 받은 말은
이제
비를 건너지 않아도
전해지고 있었어.


그렇게

말은 사람을 바꾸지 않아도
사람이 스스로를
조금 덜 미워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하다는 걸
나는 그날 배웠지.


돌고 돌아, 다시


그날은
아무 일도 없던 날이었어.


비도 오지 않았고,
특별히 마음이 무거운 이유도 없었지.
오히려
"오늘은 좀 괜찮네"라고
생각하던 오후였어.


서점 계산대 앞.
줄이 길어
조금씩 밀리고 있었고,
앞사람은 책을 고르느라
결정을 못 하고 있었어.


예전 같았으면
속으로 한 번쯤
한숨을 쉬었을 텐데
그날의 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뒤에서 들렸어.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짧은 말이었는데
심장이 먼저 반응했어.


고개를 돌렸더니
나보다 조금 어린 사람.
표정에
쓸데없는 친절이 없었어.
익숙한 얼굴도 아니었지.


계산대 앞사람이
미안하다는 듯 웃자
그 사람이 덧붙였어.


"지금 속도면
충분해요."


그 순간
시간이 한 박자 늦춰졌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사람을 봤어.


그는
자기가 한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처럼 보였어.
아니,
그 말을
한 번쯤 꼭 필요했던 사람처럼.


계산이 끝나고
우리는 함께 문을 나섰어.
바람이 불었고,
종이봉투가
살짝 흔들렸지.


나는
결국 말했어.


"그 말…
자주 하세요?"


그 사람은
잠깐 생각하다가
웃었어.

"예전에
누가 저한테 해준 말이에요.
그때 진짜…
살았거든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그럴 필요가 없었어.


아,
이렇게 돌아오는 거구나.


비 속에서 받은 말이
카페를 거쳐
이 사람을 지나
다시 내 뒤로.


형태는 달라졌는데
의미는 조금도 닳지 않은 채로.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어.
이름도 모르고,
다시는 못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야.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니었어.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람에게
스스로 도착하는 말.


그리고 나는
그날 알았어.


어떤 말은

붙잡지 않아도 되고,
소유하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만
한 번
진심으로 건네지면
이렇게
다시 돌아와
우리를
한 번 더 살게 만든다는 걸.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 말을
가볍게, 그러나 분명하게
건넬 수 있어.


지금 속도,
괜찮아요.


이 글이 당신에게도 닿기를.
당신의 속도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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