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상영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너그럽게 봐주시길. 제작비로 편성시간에 맞춰 방송을 하는 것은 잘 갖춰진 시스템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처음 영화를 만드는 건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만들고 끝! 이 아니라 관객을 만나기 위한 그다음 작업이 정말 중요한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방송은 그야말로 마감에 맞춰져 있는 일정이라면 영화는 많이 다르더군요.
저희는 많은 홍보를 기대하기 힘든 언더독 같은 상황이어서, 영화제를 돌며 입소문을 많이 내려합니다. 그래야 개봉을 할 수 있죠.
조금은 더 많은 관객분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유럽 도시 기행처럼 기록해 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약간 그냥 일기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서울의 밤
#The Seoul Guardians
#로테르담영화제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긴 비행을 견디고 또 우버를 타고 도착한 로테르담.
이 도시는 2차 대전 당시 폭격 피해를 입고 그 이후 새로운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유럽 도시 특유의 고풍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현대적이고 과감한 디자인의 건축물도 많았다.
로테르담의 인상은 차분하고 붐비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문화적인 느낌.
한국 겨울보다 춥진 않은데 끈적하게 냉기가 뼛속으로 들어온다. 피로누적인지 밖에서 거리를 걷다 돌아올 때쯤이면 목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질 정도.
바다를 면한 도시의 습도가 높고 차가운 기후에서 느껴지는 상쾌함 그러나 은근한 썰렁함..
네덜란드인들의 평균 체격이 커서인지 (네덜란드 남자들의 평균 키는 183cm이라고 한다) 욕조가 넓은 것만큼은 정말 좋았습니다. 네덜란드에 여행을 온다면, 길게 뻗은 욕조를 꼭 즐기시길.
아침에는 공동 연출인 김신완, 조철영 pd와 조식 및 뜨거운 커피를 찾아 시내 탐방하며 정신을 차렸다. 나의 훌륭한 동료들. 일할 때는 정말 일답게, 그러나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이.
떨리는 경험이었네요 지나고 보니.
같은 내용이라도 '시네마틱한 경험'으로 구현하는 일은 어떤 걸까요.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잘 만들어야 하는데..
영화만큼 큰 규모의 팀과 사업은 아니다. 다큐멘터리는..
어떤 사람은 정말 혼자서 움직이지만, 보통은 소규모 팀. 그래서 끈끈해지고 서로가 중요한 팀..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 그 한복판에서 겪는 경험, 그 속에서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아픈 기억이 출몰하는 내면으로의 여정이 교차되면서 스스로 느꼈던 변화와 한순간 뜨거웠던 감정을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
다른 문화권의 관객들이 느낄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 이야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말을 많이들 인용했다. 그러나 주워들은 말을 읊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고 싶었다.
벽에 부딪혔을 때.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우리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긴장감, 마치 그곳에 있는 듯한 시네마틱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는데,
이 긴장감 속에서 ‘공통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들어가게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수많은 시도, 그리고 또 리서치. 어렴풋이 어떤 느낌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래도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계엄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너무 말이 많고 의기양양한, 우리와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 아니라 조금 더 어수룩하거나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상상했다.
그런 과거의 사람들,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죽은 자들의 말만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윤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루지 못한 것' 만이,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행동한 사람들의 고통만이 (그리고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고통)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이끈다.
이제는 공동체라는 게 거의 사라진 시대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물음을 준다.
영화의 주제와 모티브를 말할 때 영어로 solidarity(연대)라는 말을 많이 했다. 연대라는 말, 내가 급할 때는 그것을 구하고 내가 좀 살만해지면 남의 일처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는 이미지를 생각하게 된다.
종교가 없어서 마음이 갈팡질팡한 나에게 보통 사람들의 고통을 찾는 일이 그나마 쉽게 썩는 정신을 지탱해 준 것 같다. 방송 PD로 생활하면서 숱하게 인터뷰해 온 타인의 불행.
정리해고 현장, 아들이 죽은 엄마의 인터뷰, 동료가 죽은 사람들과의 인터뷰...
그렇게 쌓이다 보니 나름대로의 기준이 생겼는데, 뉴스보다는 조금 더 긴 논픽션 저널리즘을 주로 하는 직업의 입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어디에서 고통이 발생하고 있는지 예민하게 탐색하고, 바로 그곳으로 갈 것.
말로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몰려다니며 권력을 탐하는 건 거짓말이라는 약간 삐딱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좀 멀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번에 모인 피디들도 대강 그런 식으로 삐딱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영화제가 상영되는 메인 공간으로 들어가자 2층부터 3층까지 초청된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영화제는 감독과 관객이 소통하는 행사가 메인이다. 처음이라 떨리기도 했고, 영어로 준비해야 하므로 더 긴장되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한분 한분에게 진실해질 수밖에 없다. 월드 프리미어 World Premier. 전 세계에서 첫 상영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한다.
세일즈사에서는 솔드아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매진이 되고 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주어야 앞으로 영화가 갈 길을 찾는다. (! 어느 바닥이나 성과가 문제다. 생애 처음으로 영화제에 왔지만 영화제를 즐길 수는 없었다. )
다행히 솔드아웃. 관객은 꽉 찼다.
무대인사를 하고 불이 꺼지고, 큰 화면에서 보는 영화는 나에게도 새로웠다.
최근에 거장 영화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말이 기사화되었다. 극장이 사라지는 시대,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에 대해서 말한 내용이다.
노장 영화감독은 "나에게 있어 진정한 (영화) 경험이란 낯선 어두운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들도록 이끌어낼 때 찾아온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낯선 사이지만, 진정 훌륭한 영화가 끝날 때면 우리는 수많은 감정을 공유하며 하나가 돼 햇살 속으로 혹은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간다"
"그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며, 우리는 이 경험이 지속되고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란다. “
아 정말 그렇죠. 티브이도 아니고 고작 작은 화면으로 보다가 다음날의 시청률만 확인하고 마는 우리의 삭막해진 작업에서, 이렇게 많은 관객들과
수백 번은 본 듯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결과물을 함께 보다니. 가슴이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70분이 지나가고 엔딩스크롤이 올라가는 시간.
박수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