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신을 이끄는 놀라운 긍정의  힘

- '성공 DNA'가 쏟아내는 세찬 시너지


세상 출세라는 공허한 욕망    

     

성공을 힘껏 외쳐보자. 

그에 앞서 먼저 성공을 출세로 여기는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그 일에서 느낄 의미와 가치를 먼저 생각해 본다. 출세에 목적을 두면 욕심과 욕망이 먼저 고개를 내민다. 그렇게 되면 자기만족이나 자기 희열을 느끼기가 싶지 않다. 

길게 보아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끝없는 욕망의 쇠사슬에 묶이게 되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일단 한 단계의 목표를 이루면 그 쾌감은 잠시 잠깐이다. 이내 또 다른 목표에 대한 욕구가 솟구치게 된다. 그게 인간의 원초적인 속성이다.   

출세라는 욕망은 돈이 더 쌓여야 만족하고, 지위가 더 높아야 충족된다. 여기에 명예가 더욱더 많아야 흡족하게 된다. 결국에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나면 어느 기간 동안은 하늘을 날듯한 기쁨을 만끽한다. 하지만 얼마간 쾌락을 누리다 보면, 외형적인 호사스러움에도 내면의 공허함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정신적인 공백을 느끼게 되며, 영혼의 진공을 체험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희구했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게 된다. 진정한 행복이란 내가 어떤 가치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감정이 정해지게 되어 있다. 돈이 많아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가진 게 별반 없어도 행복에 겨워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가치관이 소유에 있느냐 나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보편적으로 출세는 소유를 좇으나 성공은 나눔을 추구한다. 출세는 수직적인 위계를 조장하지만, 성공은 수평적인 평등을 조성한다. 그러고 보면 출세와 성공은 맞섬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소득 3만 달러와 행복도


그래서 성공의 가치관을 갖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해하며 감사를 얻는다. 그들이 안정된 행복감을 감사해하는 이유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자랑하는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늘 하위권을 맴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으로 이룩한 압축성장은 밝고 어두운 양면성을 드러냈다. 

'60년대 국민소득 50달러에 견주어 보면 지금 무려 600배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산술적인 논리로라면 행복도도 그만큼 커졌어야 맞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냉장고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가득 차 있으면 전 세계 인구 3퍼센트에 해당하는 부유층에 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겉으로만 보면, 마냥 행복의 찬가를 소리 높여 불러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행복지수는 크게 뒤쳐저 있다. 여기에 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3위(2016년 기준)에 자살률은 계속 1위다. 갈등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은 연간 최대 236조 원에 이른다는 한 연구기관의 통계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정상을 벗어나 있다는 반증이다. 역시 국제기관의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국가 종합갈등지수가 상위권인데도 이를 관리하는 지수는 최하위권(27위)이다. 그 반대의 경우를 보자. 갈등지수가 가장 낮은 핀란드(30위)는 갈등관리지수가 최상위(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한국같이 갈등지수가 높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갈등관리지수가 높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핀란드처럼 갈등관리지수가 높으니 국민의 갈등지수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게 선진사회의 참모습이다.  

이것을 사회문화적으로 접근해보자. 한국의 갈등지수는 사회 전체가 출세 만능과 물질숭배에 빠져 있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러다 보니 온 나라가 치열한 이전투구식 경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참다운 성공의 가치가 정착되어 있지 않아서다. 우리가 갈구하는 이상은 핀란드와 같은 선진국가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나눔과 평등이라는 성공의 가치관이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내 삶에 담긴 성공 마인드 세트 


그래서 우리는 성공의 마음가짐, 즉 성공 마인드 세트를 체득하는 게 절실하다. 성공을 지향하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긍정의 기운이 내게로 다가오게 된다. 곧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생성 기운이 따르게 되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들리는가. 그러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세니 관운이니 팔자니 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또 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우리가 늘 듣는 긍정의 힘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것을 역술적인 관점으로 몰아붙일 일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을 갖는 본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에 의탁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분명 인간 문명의 과학이나 기술로 범접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운을 따져 직원을 뽑는 회사가 있다. 경영의 신으로 불리며 일본 마쓰시타전기를 창업한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사장은 신입사원 면접 때 꼭 묻는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전부 채용을 했다. 기업의 성패를 쥔 사원을 선발하는 창업자는 응시자의 능력보다는 운을 더 중시한 것이다. 그가 눈여겨본 것은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사람의 심층에 있는 의식이었다. 그 안에 담긴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감사하는 태도를 본 거다.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남과 똑같은 상황에서도 남보다 더 많이 감사할 줄 안다는 점이다.(차동엽,『무지개 원리』참조)


겸손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어차피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고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은 존재한다. 그것을 통틀어 '코스믹 오더링'cosmic ordering이라 한다. 이것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온전한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가장 적합한 때에 자신에게 '합당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이다. 

여기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예로, 복권 1등을 당첨시켜 달라고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것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무슨 말로 정의를 내리던 성공의 가치를 체화하면 긍정적인 정신 체계가 구축된다. 성공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 아니 환경의 섭리에 순응하는 겸손과 포용의 자세를 갖게 한다. 

이에 비해 출세는 자신의 우수성과 능력을 믿는 자만과 교만과 욕심으로 자신을 채운다. 그래서 성경에는 '겸손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오로지 목표지향적 자존심에 찬 출세는 훗날에 가서는 헛된 것이라는 회한을 불러온다. 나아가 과도한 출세욕으로 인해 패망에 이른 경우를 많이 접해 보지 않았는가.  

성공.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이 된다. 성공이 습관이 되면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인생의 기회가 가장 적합한 때에 다가온다.  말하자면 긍정의 생각, 선량한 언어, 열린 행동이 양성 순환이 되는 자연 이치다. 일단 성공을 자꾸 되뇌는 훈련을 계속하게 되면 보면 성격이나 인성도 그렇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도 '습관이란 타고난 성격도 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한마디로 성공적인 인격으로 빚어내는 습관을 갖게 되면 자신에게 성공의 유전자가 발현된다. 그러면 성공이라는 말에 담긴 에너지가 인생의 시너지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 01화 인생 성공을 가져오는 아침 독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