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Nov 05. 2024

층간소음 기념일

소소한 복수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했나 보다. 친정은 근처지만 시댁은 차 타고 4시간 거리에 있다. 남편이 육지로 돌아오면 연례행사처럼 시댁을 방문한다. 그래서 명절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다. 친정식구들과 밥 한 끼 먹고 나면 그저 푹 쉬거나 놀러 가는 날이다. 추석 행사가 열리는 박물관에 가볼까, 새로 생긴 대형 카페에 가볼까. 어디든 붐빌 것 같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계속된 외출에 지쳐있던 우리 모자는 이번 추석 연휴는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육아는 장비발이다. 연휴가 되기 전에 새 장난감을 사서 옷장에 숨겨두었다. 아이가 계속 가지고 싶어 했던 트랙완구였다. 출발점에서 시작한 구슬이 도착지점에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놀잇감이었다. 아들은 장난감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아빠가 사준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와, 정말 아빠가 사준 거예요?"라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거짓말에 홀랑 넘어간 아들의 함박웃음에 나도 행복해졌다. 그의 순수한 믿음이 나를 더욱 미소 짓게 했다


 신이 아이는 열심히 트랙을 만들었다. 예시에 나 길을 따라 만들다가 점점 스케일이 커졌다.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이어지는 트랙에 멋지다고 박수를 쳤다. 경사가 급한 길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이동식 의자가 동원됐다. 잘 굴러가는지 테스트를 하다 보니 구슬이 여러번 길을 벗어났다. 평평한 바닥과 장난감이 만나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딱딱한 음향이 불길했다. 구슬이 예닐곱 번 정도 떨어졌을까.    


쾅쾅쾅!  



 아뿔싸.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다. 아랫집에는 작은 소리도 귀신같이 알아듣는 소머즈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도마질을 했다. 그동안 집 안에 쌓아놨던 평온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이번에는 왜 올라왔는지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른의 치부를 감추려 아이에게 헤드폰을 씌우고 영상을 틀어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초인종은 울리고 문을 두드리소음이 계속되었다. 소리는 점점 커져서 마치 집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려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계~~~~ 속 구슬 같은 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내가 도저히 안 돼서
이사 가려고 집도 내놨어.  



 역시 소리 소믈리에. 구슬 소리를 단번에 알아맞히다니. "아랫집 아주머니, 생존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그 여자는 안색이 영 별로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그날은 처음으로 우리가 만든 소리에 올라온 진짜배기 층간소음 기념일이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지은 죄가 있어서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문 옆에는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그녀의 남편이 서 있었다. 날뛰는 아내를 만류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 아저씨는 정상이었구나. 그동안 아주머니의 닦달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연락을 하셨나 보다. 한패라고 오해해서 죄송해요. 짧게나마 음속으로 사과 말을 건넸다. 시선을 돌리자 분을 참지 못해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저러다 숨 넘어겠네. 싸울 때는 이성을 유지한 사람이 이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성난 동물을 관찰하는 인류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당신은 어쩌다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 되었나요."하고 묻고 싶었다. 담담히 서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갑자기 반쯤 열린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 아줌마가 선을 넘네. 그동안 쌓인 우울과 분노를 생각하면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소소한 복수를 하기로 했다.


요즘 층간소음 방지 매트도
잘 나오던데 그거라도 깔던가.

나 요즘 정신과 약도 먹어요.
집중을 못 하겠어, 집중을!


그럼 층간소음 매트 시공하는 거
아줌마가 돈 대주실래요?    


 한껏 상기돼서 길길이 날뛰던 아주머니가 동작을 멈췄다. 마치 누가 얼음물에 집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버렸다. 열기와 분노로 가득했던 공간이 소화기를 뿌린 것처럼 고요해졌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굳어버린 얼굴은 우스꽝스러웠다. 어버버 하는 모습에 속이 다 후련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아주머니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집인 양 문을 끝까지 열어젖히고 도어스토퍼를 거칠게 밟아 내렸다. 삿대질을 하며 계단으로 향하는 아주머니는 다시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내... 내가 너 경찰에 신고하고 올 거야!
문 딱 열고 기다리고 있어!
당신!
거기서 문 닫지 못하게 지켜보고 있어요!  



 작전은 성공했다. 돈에 예민한 사람이라는 건 그간의 대화로 짐작하고 있었다. 예민하면 작업실을 구하시라, 카페는 어떻냐 말할 때면 매번 돈이 든다는 말을 꺼내셨더랬다. 마음을 곱게 먹고 정신과 약만 줄여도 커피값은 나올 텐데.


 그나저나 경찰을 부른다니 정말이지 계산에 밝지 못한 이다. 우리 집 앞에서 난동을 피웠으니까 주거 침입죄로 고소를 진행할 수 있는 건 이쪽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겠다니 환영한다. 스로 수갑을 채워달라면 응해줄 수밖에.


 그래도 공권력을 이런데 낭비하면 쓰나.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줌마, 이리 와 보세요."라고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을 제대로 건드렸는지 아주머니는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남기고 아래층으로 퇴장했다. 옆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저씨에게 안쓰러운 눈인사를 건넸다.


경찰 오면 문 열 테니까, 내려가 보세요.



 안심할 수 있게 여러 번 고개를 주억거리자 아저씨는 얌전히 계단 밑으로 내려가셨다. 현관문을 닫고 나니 바닥에 고여있던 적막순식간에 차올랐다. 조용해진 공기를 욕심껏 쓸어 담아 몸속 깊이 집어넣었다. 폐가 부풀고 이윽고 큰 한숨이 되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곧, 경찰이 와서 문을 두드리겠지. 또 이런 일로 경찰관 아저씨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요는, 경찰방문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다. 이야기는 남편이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 12화 인사이드 아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