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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해 Oct 22. 2024

행복한 우리 집

프롤로그

 기억 속 첫 번째 우리 집은 시장통 한복판에 있었다. 붉은 조명 속 생고기 진열장 너머의 작은 셋방이 우리 네 가족의 보금자리였다. 부모님은 매일이 바쁘셔서 어린 딸내미는 분주한 골목을 자유롭게 누볐다. 분식집 친구네 다락방에 올라가 숨바꼭질을 하고, 연탄불에 똥과자를 만들다 얼굴을 데다. 아무 데나 던져 놓은 씽씽이를 여러 번 잊어버린 값으로 동네 술래잡기의 여왕이 되기도 했다. 방앗간 친구네는 책이 많정신없이 읽다 보면 시간이 물처럼 흐르곤 했다. 방 한 구석에 책장을 넘기는 나를 두고 친구 가족은 티브이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그것이 민폐라 여겨지지 않던 정겨움이 그 시절에는 있었다.   


 친구집도 좋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장소는 우리 집 오른편에 붙어있던 탕제원이었다. 문이랄 것도 없이 탁 트인 가게는 작은 여자아이가 숨어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란히 줄을 선 다섯 대의 추출기에서는 쌉쌀한 풀과 흙냄새가 진동했다. 반대쪽 벽면은 크고 작은 담금주가 자리를 차지했다. 금색으로 물든 인삼주에 햇빛이 비치면 투명한 유리병은 화석이 된 호박처럼 빛이 났다. 그 영롱함이 좋아서 옆집이라는 핑계로 탕제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지정석은 추출기 맞은편에 놓인 손님용 소파. 파충류를 닮은 진녹색 가죽은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놀랍도록 차가웠다. 그 찬기를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우는 게 좋았다. 커다란 성 안의 공주님 침대처럼 누워서 발을 뻗어도 한참 공간이 남았. 눈을 감고 공상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르륵 잠이 들 했다.


자릿세를 받아야겠는데?



 탕제원 아주머니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셨다. 추출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뒤에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 들어와 한참을 놀다가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눈을 떴다. 겨울도 아닌데 부르르 몸이 떨렸다. 접힌 무릎을 감싸 쥔 채 손바닥으로 살갗을 문질렀다. 오돌토돌 돋아난 소름이 징그러웠다. 잠을 너무 많이 잔 걸까. 이유 없이 서러웠다. 엄마한테 가야지. 가서 안아달라고 해야지. 몸을 일으키는데 발치에 처음 보는 대야가 눈에 들어왔다. 욕조가 없던 시절에 곧잘 들어가서 물놀이를 했던 커다란 고무대야였다.



 그 안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있었다. 커다란 흰색 덩어리는 표면이 매끄러운 연두부 같았다. 뾰족한 귀 밑으로 꼽처럼  자국이 있었다. 고무통 바닥에 고인 핏물과 대조되는 창백한 피부에는 서늘한 푸른빛마저 돌았다.


  깬 눈으로 대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래된 그릇 속 이물질은 현실감이 없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죽은 개라는 걸 알아차렸다. 천지 분간 못하는 어렸을 때라 그랬을까. 아니면 놀란 가슴이 마음을 속여버렸을까. 무섭다거나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떨어져 있는 신발을 천천히 주워 신고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 기억은 지금도 눌어붙은 냄비 속 자국처럼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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