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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해 Oct 23. 2024

누구나 비밀은 있다.

그녀의 기행, 나의 기행

 그녀의 기행은 놀라웠다. 발작처럼 찾아오는 이상행동은 창문 열고 소리 지르기, 대형 쓰레기 수거함 엎어놓기, 땅바닥에 테이프 붙이기 등 다채로웠다.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측은하게 여겼던 마음은 닫힌 창문 사이로 들리는 욕설이 시간을 넘어가자 말끔히 사라졌다.


 간혹 창문을 열고 "이 XXX아, 좀 닥쳐!"라고 응수하는 같은 동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경찰이 찾아오고 입주자 회의에서 고소를 진행해도 그녀가 입을 다무는 일은 없었다. 경비원 아저씨는 쓰레기 수거함에 사슬을 달덕지덕지 붙여놓은 테이프 주차장에서 제거했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마치 시계추를 돌린 것처럼 같이 일이 반복됐다. 스스로 시시포스를 자처한 그녀는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느라 매일 고군분투했다. 떨어지는 돌조각에 맞지 않으려면 우산이라도 꺼내 들어야 할 판이었다.


 가족은 없어요?

 있지. 아들이랑 남편이랑 같이 사는데 가족 앞에서는 멀쩡해. 남편 옆에서는 어찌나 조신하게 걸어가는지. 아들도 허우대가 멀쩡하더라니까.



 언젠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얼굴을 격했. 줄무늬 티셔츠에 헐렁하게 묶은 머리, 터벅터벅  수척한 옆모습에서 평소의 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반인 코스프레가 수준급.해코지를 당할까 그만 쳐다보라며 팔을 당기는 엄마의 행동에 고개를 돌렸다. 떻게 생겼는지 금세 잊어버릴 만큼 희미한 인상의 여자였다.


 독립할 때까지 몇 개월 동안 그 여자의 목소리를 모닝콜 삼아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심심찮은 경찰의 방문을 흥미롭게 조망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이랬던가. 그녀가 레퍼토리를 시작하면 창문을 닫고 노래를 틀거나 휴대폰 볼륨을 높였다. 엄마가 저 아줌마집 옆집을 사지 않았다는 게 신의 한 수였다. 소음폭탄을 맞고 있는 옆동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평생을 바쳐 마련한 보금자리가 저런 사이코에게 걸리지 않은 건 천운이었다.


 가정을 꾸린 뒤 바다를 마주한 작은 아파트를 골라 세를 들었다. 기관사인 남편은 임신한 나를 남겨두고 항해길에 올랐다. 아들, 아들 하던 세상은 딸, 딸을 외치는 트렌드를 타고 아들을 임신한 나에게 쓸데없는 위로를 건넸다.


 아들만 둘인 시어머니는 대놓고 "나는 딸이 좋은데."라고 서운해하셨다. 같은 시기에 딸을 가진 친구에게는"괜찮아."라는 갈 곳 없는 위안의 말을 들었다. 하는 마음에 "어머니가 고추꿈을 꾸셔서 그렇죠. 다른 태몽을 꿔 주지 그러셨어요."라고 응수해 드렸다. 친구에게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난 아들이라서 좋은데."라고 받아쳤다. 어이가 없었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떠랴. 더 따지려다가 교를 생각해서 다. 배가 부르더니 대인배가 됐다.


 

 당시 붐이었던 자연주의 출산의 유행을 타고 개인실에서 조산사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낳았다. 출산에 여윳돈을 쓴 이유는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아기가 나올 시기에 맞춰 배를 내릴 예정인 남편에게 우리 아기는 우리가 보자 의견을 냈다. 후조리사를 부르고 남편이 24시간 옆에 붙어 있으면 아늑한 우리 집표 모자동실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새벽에 울어대는 아이에게 울음분석 어플을 들이다. 유튜브에서 검색한 백색소음 틀어놓고 휴대폰을 베개 삼아 쪽잠을 잤다. 유능한 산후조리사 아주머니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말에 절히 공감.


 치열한 하루의 끝자락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은 선천성갑상선기능저하증 판정을 받았다. 내 손톱만 한 발가락에서 몇 번이나 피를 채취했다. 대학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아기는 한없이 미약했다. 검사실에 데려갈 때면 대기실의 모든 눈이 여린 몸뚱이를 향했다. 그 눈초리가 아이에게 쏟아지는 화살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트레스 때문일까. 모유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어차피 매일 약을 먹어야 해서 분유를 줘야 했는데 포기가 안 됐다. 모유가 그렇게 좋다는데. 제발 이거 하나라도.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연한 산들바람에도 마음은 갈가리 찢겼다. 땅바닥에 어진 마음을 이어 붙이려고 모유수유에 집착했다.


 터를 찾아가거나 집에 사람을 불러서 받는 마사지는 그때, 효과가 없었다. 이 지긋한 아주머니는 내 가슴을 반죽처럼 주무르며


삼신할머니께 기도드려 봐.
그게 진짜 효과가 있다니까.



라고 일러주셨다. 간절한 마음자기 전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마가 준비해 준 비릿한 사골국과 미역국을 매일 한 대접씩 마셔댔다.


 당시 합리적인 육아랍시고 아침에는 내가, 낮에는 같이, 밤에는 남편이 아기를 봤. 밤에 수유를 해야 호르몬으로 인해 젖량이 는다는 걸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이야기다. 에는 준비한다고 육아 관련서적을 꽤 찾아 읽었는데도 소용없었다. 인생은 실전이었다.


 황달끼로 노래진 아 얼굴을 보고서야 욕심을 내려다. 지금 생각하면 수면부족과 스트레스, 죄책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다.  몰리면 누구든 정신이 나갈 수 구나. 마집 미친 여자도 마찬가지겠지. 지금도 소리 지르고 있으려나. 아이에게 모자란 젖을 물리며 멍하니 그런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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