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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23. 2024

그녀의 등장

 좁은 골목 속 유년기는 그럭저럭 지나갔다. 우리 가족은 다른 시장을 거치고 미용실 2층집을 지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언니와 각방을 쓰게 된 나는 진심으로 환호했다. 거기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다시 한번 이사를 했다. 외풍이 심한 단독주택 2층이었다. 도시가스가 연결이 안 된 오래된 주택은 기름값이 무서워서 보일러를 틀 수 없었다. 겨울 때때로 방 안에서도 입김이 나올 만큼 추. 하지만 단 한 번도 불만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집을 옮기면 옮기는 데로 순응하고 살았다. 신문지에 싸인 그릇더미를 노란색 컨테이너 박스에 차곡차곡 담는 엄마의 뒷모습이 지 않았다. 철없는 막내딸은 그저 금씩 넓어지는 새 집이 좋았다.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서 그랬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둔한 구석이 있다.

 긴 우여곡절을 끝내고 내가 독립해 있는 동안 엄마는 드디어 집을 샀다. 기나긴 고생을 뒤로하고 올곧은 자기 집이 생긴 것에 대해 얼마나 가슴 벅차고 뿌듯해하셨을까.


 “내는 여기에 뼈를 묻을란다.”


 지나가듯 중얼거리는 엄마의 표정에서 그간의 설움을 읽었다. 그래. 언덕길이 조금 있으면 어떠랴. 아파트 옆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어 공기가 맑고 시원했다. 신식 아파트는 아니지만 차단기가 설치된 주차장도 있었다. 놀이터와 작은 공터에서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복도식이 아니니 외풍걱정도 덜했다. 조금 있으면 마을버스가 집 앞까지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다려 볼 일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집을 거쳐왔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아파트가 가장 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방에는 언니가 결혼하고 나가기 전까지 쓰던 침대와 책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도 결혼해서 나가기 전 몇 개월 동안 그 방을 썼다. 침구에서 느껴지는 엄마냄새가 좋았다. 무뚝뚝한 아빠의 등을 긁어드리고 함께 티브이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다시는 이사 가지 않으리라는 엄마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따뜻하고 포근한 이곳은 드디어 생긴 행복한 우리 집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정도 지났을까. 건물 밖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잠 깼다. 느긋한 아침잠을 방해받은 탓에 저절로 이맛살이 찡그려졌다. 폭신한 이불을 휘감아 다리사이에 끼우고 다시 한번 새우잠을 청하려는데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단번에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정체를 알 수 없 말들이 색처럼 선명해졌다.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이 XX것들아! “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난무하는 욕설이 아파트 단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미어캣처럼 고개를 움직였다. 아무래도 건물 뒤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서 베란다 문을 열었다. 갈수록 커지는 여자의 고함소리는 바로 옆동에서 들려왔다.


 “어? 느그들이 내 지켜보고 있는 거 모를 줄 아나. 어? 내가 다 안다, 이 XX들아! 그래봤자 소용없어. 어? 내가 느그들 찾아다가, 어? 다 죽여버릴 거다. 어? 이 XXXX 같은 XXXX야! “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공에 울리는 독백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저주하고 있었다. 고래가 울었다면 딱 저 정도 데시벨이리라. 나는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발걸음은 느릿했다.


 “엄마, 저거, 뭐예요?”


 황한 마음에 질문이 뭉개졌다. 설거지를 하느라 분주했던 팔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멈췄다. 수도꼭지를 잠그자 떨어지는 물소리 가려졌던 여자의 악다구니가 륨을 높였다뾰족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거실  기를 한껏 긴장시켰다엄마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내 쪽 향했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엄마의 입술에서 작지만 또렷한 네 글자가 직하게 진동했다.


 “미친 여자.”


 엄마의 얼굴은 무섭도록 덤덤했다.

 탕제원에서 죽은 개를 발견했을 때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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