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르겠는데
당신은 행복한가?
시작하기 전에 약간의 양해를 구하겠다.
해라, 양해
지금의 나는 중2병이 온 EMO키드가 아니다.
우울증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보라색 라이트를 비추고 있지도 않다.
단지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주화입마에 빠져버린,
막대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스스로의 정강이를 타격해 버린 상태일 뿐이다.
일단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향정신성의약품에 절여져, 침 흘리며 나비를 쫓아다니는 인간의 미소가 행복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바세계에서 짊어지던 모든 것들에 대해 ‘다 ㅈ이나 까 잡숫쇼, 나는 떠납니다.’ 하는 노인의 후련함이 행복인가?
나는 행복을 모른다.
겸손도 아니고, 고백도 아니고, 미덕도 아니다.
겠냐?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듣고 자랐다.
“행복해지려면 열심히 살아라”
조금씩 다른, 수없이 많은 베리에이션이 있지만 의미는 대충 비슷하게,
그 말을 하는 어른의 얼굴은 늘 선의를 띄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이 의심하지 않았었다.
내가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철학을 접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언제나 등을 긁으려 손을 뻗어도 도저히 닿지 않는, 그 등의 중앙처럼 가려운 부분이 언제나 존재했다.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일단 그런 말을 해주는 어른들의 모법답안들을 살펴보자면
성취, 안정, 정상, 평균 등등 이 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관리하기 쉽고, 측정 가능하며,
무엇보다 대중적으로 권장되기에 안전한 것들 이였다.
행복은 끝내 정의되지 않았고,
도착지로 삼기엔 살짝 어중간한 목표만 남았다.
이런 구조에서 행복은 늘 미래형이다.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에 불행하고,
도달한 순간부터는 유지하느라 불안해진다.
스스로 행복하다는 인간에게 행복하냐 묻는다면, 십중팔구 복잡한 생각이 휘몰아치는 표정을 지으며
“행복하지…”
하곤, 한숨을 토해내듯 대답한다.
뭐… 결국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채무가 된다.
목표형 행복은 사막의 신기루와 닮았다.
도달할 수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도달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에 거지 같은 문제인 것이다.
나는 왜 행복을 인지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내가 보고 있는 세계의 해상도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요구하는 해상도와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질문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명징 해지지만 행복은 흐려진다.
아마 행복한 상태에서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행복은 질문이 줄어들수록 잘 보인다.
고통을 덜 묻고, 구조를 덜 따지고,
“그냥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수록 행복은 가까워진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 나 자신을 흐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마비와 행복을 혼동한다.
약간의 둔감함, 약간의 차단, 약간의 “괜찮음”.
고통이 사라진 게 아니라, 고통을 처리하던 감각이 꺼졌을 뿐인데,
그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뭐, 다른 사람이 그 상태에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훼방을 놓겠는가?
다만 나 스스로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싶지 않을 뿐이다.
주지육림, 술로 된 연못과 고기로 된 숲이라는 충만감을 뜻하는 사자성어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풍요라고 부르지만
나는 아마 그 술로 된 연못에 낚싯대를 던져 생선을 잡으려 할 것이다.
내가 까다로운 것은 아니다.
불행을 숭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내가 찾는 것이 그 진열대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개소리를 하는 자에겐 환자와 의사라는 명칭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받아쓰기를 시켜야 한다.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열쇠일 뿐이지 행복의 자격이 아니다.
겠냐고
고통을 견뎌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지 않는다.
단지 무너진 인간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쉽게 만들 뿐이다.
가시넝쿨 위의 왕좌에 존재하는 행복이란 그 자체로 행복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
나는 행복을 좇지도 않고, 불행을 미화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지금의 이 감각을 놓지 않으려 한다.
질문이 멈추지 않는 상태,
웃을 수는 있지만 속지는 않는 자리,
살아있다는 감각
그 정도면 지금 당장은 충분하다고 본다.
나는, 이 글은 끝내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못한다.
어떻게 행복해지는지,
왜 행복해야 하는지
대신
행복을 안다고 거짓말하지 않겠다.
숨기지 않는다.
인정하겠다.
돈키호테에게 “병신ㅋ”이라는 조롱을 날릴 수 있는 인간
그것이 나다.
.
.
.
라고 말할 줄 알았나?
난 월 오 백만 원 상당의 요양원 생활을 3년동안 한 후,
스무 명의 자손들에게 둘러 쌓여, 늘그막에 낳은 막내딸이 내 침상의 한 켠을 눈물로 적시는 임종의 그 순간까지
아마 속으로 ‘행복이 대체 뭐 야 시발’라는 질문을 되 뇌일테다.
뭐, 어쩔 수 없지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