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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Apr 27. 2023

03. 비밀 장소를 찾아가는 길

[에세이] 친구, 물고기 그리고 저수지

시골길은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봄이 되면 모내기를 위해 점심상이 그 위에 펼쳐지고 가을이면 그 위에서 추수한 곡식들을 말리느라 다시 바빠진다. 겨울이면 눈과 함께 하얀 얼음이 추위가 가실 때까지 길 위에 그 자국을 길게 남겼다. 그리고 여름이면 또 다르게 몸부림쳤다. 여름의 시골길은 뜨거운 열기에 녹아 들었고 길 위로 모여든 벌레 떼와 만나는 날엔 고생을 해야 했다. 변덕스런 날씨로 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길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이 되는 걸 여러 번 본적이 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만 어쩌면 땅 위에 있는 물의 양보다 공기중에 분자로 떠 있는 물이 더 많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비밀 장소가 생긴 건 그 다음이다. 내가 친구를 따라 길을 나서게 되면서다. 정오 정도에 그와 만나게 되면서 나는 우연히 그곳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친구는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두고 가기 어려운 산길로 나를 안내했다. 마치 그는 잘 만들어진 길 대신 담과 지붕으로 걸으며 여행하는 것 같았다. 우리 둘은 이렇게 산길을 걸었다. 처음엔 동네 뒷산을 걸어서 넘었고 새로운 산이 나타나면 다시 반복해서 걸었다. 나중에는 시야에 들어오던 동네와 강줄기가 사라지고 이젠 사방을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간간히 허기를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힘이 들진 않았다. 이렇게 참고 더 걸으니 빽빽하게 감싸고 있던 나무들 사이로 조그맣게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조금 후 물결이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수지였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작아 보였다. 친구는 이곳이 자신만 아는 비밀 장소라 했다. 친구는 이곳을 오아시스라 불렸고 가끔씩 혼자 먼 산길을 걸어 이곳에 온다고 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친구는 처음으로 제법 긴 시간을 들여 여러 얘기를 해주었다. 저수지는 산꼭대기에 있다고 해도 맞을 만큼 높은 곳에 숨어 있었다. 농사용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산속 높은 곳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산꼭대기다 보니 조그마케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저수지는 세상과 단절된 모습으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친구는 이곳에서는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저수지의 조용함과 심심함을 느끼고 즐기는 것 같았다.


내게도 친구의 저수지가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내가 오아시스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본 것은 이곳과 닮은 게 많아 보였다. 상류에는 금발 같은 모래밭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고 이곳에는 나지막한 버드나무들이 자라면서 뜨거운 여름의 기운을 연두색으로 식히고 있었다. 낮고 자그마한 오아시스는 시간이 지나도 신비하게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버드나무 한 그루를 골라 그 그늘 아래 앉았다. 그리고는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오아시스의 표면이 살랑거리는 것을 같이 지켜보았다. 표면은 거울인양 지나가는 파란 하늘 속 하얀 구름을 투영하기도 했다. 


친구는 이곳에서 수영을 한다고 했다. 그는 저수지의 맞은편까지 헤엄쳐 건너기도 했고 저수지의 가장 깊은 곳까지 잠수를 하기도 했다. 친구는 계곡물은 차가워서 오래 있지를 못하지만 여기는 바닥에 보일 정도로 물이 깨끗하고 따뜻해서 하루 종일 수영해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는 그곳에서의 수영이 꼭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친구는 그날 실타래를 풀 듯 많은 얘기를 내게 해주었다. 그러나 여친구는 여전히 왜 혼자서 이곳까지 와서 시간을 보내고 긴 시간을 수영을 하는지는 내게 말하진 않았다. 나도 그에게 이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우리는 늦지 않게 돌아가야 했다. 가는 길 역시 산길로 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산길을 걸었고 늦은 오후가 되면서 더위가 가시면서 좀 더 쉽게 되돌아올 수 있었다. 멀리 동네가 보이는 곳까지 오자 친구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에서 제일 크게 자란 상수리나무를 올려다보더니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것은 친구가 먼저 나무에 올라갈 테니 내가 따라 올라오라는 암시였다. 친구는 타잔 마냥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고 나도 그를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우리는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마을은 더 가까이 보였고 주변은 조용했으며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나무에 붙어 있었다. 


내가 먼저 나무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이번엔 친구가 나를 멈춰 세우더니 나를 더 높이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위험하다며 사양했지만 결국 친구의 눈 높이 만큼 높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무 밑동에서 우두둑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고 나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우리는 놀라 쓰러지는 나무를 꼭 붙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지만 우리가 매달린 나무의 꼭대기는 땅과 부딪히지 않은 상태로 멈춰 섰다. 우리 둘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떠 서로를 마주보며 신이 나서는 한껏 웃어 댔다. 우리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한번도 혼자서 나무에 오른 적이 없었다. 동네에도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누가 먼저 올라가면 나도 똑같이 따라 올라가곤 했다. 간신히 올라가서는 아름들이 줄기를 꼭 안고서야 튀어나올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한껏 긴장한 탓에 시선을 멀리 보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누가 아래서 봐주고 서야 간신히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친구가 몇몇을 비밀 장소에 초대한적이 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챙겨 자전거에 싣고 그곳에 갔다. 그러면서 비밀의 오아시스가 잠시 아이들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곳의 조용함은 사라졌지만 좋았고, 라면으로 끼니를 채우는 것도 좋았고, 깊은 물속을 헤엄치는 것도 좋았다. 여기서는 누가 잘 먹고, 누가 물속에 오래 있고, 누가 멀리까지 헤엄치는지가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 위에서 패달을 밟으며 돌아오는 길 역시 재미있었다. 


> 이미지 출처: https:// mastodon.online/@aperig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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