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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Sep 28. 2022

11. 배려가 변화를 만든다

[에세이] 나는 퇴사에 실패했다

  친한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만 여러 번 받질 않았습니다. 밤시간에 온 전화라 만나게 되면 퇴사와 관련해 뻔한 레퍼토리가 이어질 것 같아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항상 내 일을 자기 일같이 챙겨주는 선배인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전화가 왔을 때는 피하지 않고 받게 되었습니다. 일찍 퇴근해서 오겠다는 말에 도서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도서관을 가게 된 데에는 나의 책 고르는 방식을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베스트셀러 위주로 골라서 보던 습관을 바꾸어 반나절 정도 시간을 들여 도서관을 천천히 둘러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면 내일 다시 가보자는 다소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도서관이 저녁 8시까지 운영해서 책을 고르고 보는데 여유가 있었지만, 선배가 일찍 오기로 하면서 시간과 여유는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다시 전화를 해서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다음으로 미룰까 하고 고민도 잠깐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립도서관이라 규모가 클 거라 생각했지만 벌말 도서관은 생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신간 도서와 잡지를 따로 모아 놓거나 펼쳐 놓은 공간이 없었고 도서관이 대여 위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이 병원의 프런트 데스크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나는 A to Z로 길게 줄지어 있는 서재를 첫 칸부터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고 서야 내가 찾던 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필요하다면 내게 돌직구를 던져줄 책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선배가 도서관에서 나를 찾는데 수고를 줄이기 위해 출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곳을 골라 앉았습니다. 내가 고른 책은 대니엘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었습니다. 생각에는 많은 집중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감정에 이끌리면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과거의 기억과 섞여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자기통제와 반대로 생각하기로 이를 막을 수 있는데 나는 새로운 길 앞에서 과거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로 운동을 배우는 것과 같이 힘을 빼고 새로운 자세를 배워 나가야 하는데 이걸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몰입하고 있는 생각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에 핸드폰이 주머니에서 진동으로 느껴졌지만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시간과 공을 들이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결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생각이 우격다짐이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시간을 집중한다고 나올 수 있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 때는 선배에게서 여러 개의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문자에 선배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음을 확인하고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앞에서 기다릴 게. 보고 있는 책 있으면 천천히 다 보고 나와.”나와 선배는 도서관 근처에 있는 실내 포차로 갔습니다. 우리는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않았고 회사에 대한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포차에 틀어 놓은 TV의 헤드라인 뉴스에 대해서만 조금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우리 둘은 술에 집중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공감에서 나온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기다릴 게 하며 보고 있는 책 있으면 천천히 다 보고 나오라는 글을 대하는 순간 나는 선배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배에게만은 더는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선배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내가 퇴사를 취소하면서 술자리도 가벼운 분위기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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