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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Oct 01. 2022

12. 감사할 게 많은 하루를 보내다

[에세이] 나는 퇴사에 실패했다

  술병이 나서 종일을 누워있었습니다. 해장을 하러 가자는 아내의 제안도 거절할 정도로 꼼짝 못하고 누워서 보냈습니다. 술 탓이라고는 했지만 강하게 밀어 붙이던 퇴사를 갑자기 항복하듯 취소를 하면서 순간 모든 긴장이 풀린 듯 몸 여기저기가 아파온 것입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험로를 부딪히며 헤매면서 다녔던 만큼 또 그만큼 고마운 경험도 많았습니다. 


  내가 퇴사를 하겠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갑작스런 변화에도 묵묵히 지켜봐 주었습니다. 많은 질문을 하고 반대도 했을 만한데도 내가 오롯이 퇴사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조용히 준비도 같이 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수입이 줄어들 것을 생각해 방법을 찾았고 대학생인 첫째는 나를 대신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큰 돈을 융통하기가 어려우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전세주고는 여기서 나오는 차액으로 상가를 얻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한가지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드 헌트의 도움을 받아 전문성이 확보된 곳으로 이직하게 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고자 했습니다. 분명 나 혼자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다면 힘든 여정이 될 수 있을테지만 내 생각에 힘을 보태 주고 행동을 같이해주니 고마운 마음 뿐입니다.


  가까운 곳으로 같이 바람을 쐬고 오자고 했습니다. 비소식이 있어 다음날로 미룰까 하고 고민도 했지만 그냥 가볍게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마침 방학을 시작한 첫째의 짐도 챙겨 올 겸 그동안 짓눌렸던 마음도 풀 겸 우리는 원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차에선 그간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원룸에선 짐을 같이 정리하고, 맛집에 들러선 같은 것을 나누고, 여행지에 들러선 산책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과의 일상이었습니다. 


  저녁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꼭 퇴사를 하겠다며 버스를 타고 집에 오던 첫날과 같이 비가 왔지만 혼자 맞는 쓸쓸한 비가 아니어서 좋았습니다. 회사 선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선배는 여행을 재미있게 보내라며 응원을 해주었습니다. 내가 선배에게 안부를 물으니 선배는 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선배는 하루 월차를 내고 내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 선배 역시도 나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해주는데 고마움과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이렇듯, 오늘 하루는 감사할 게 많은 하루였습니다. 


  다음주부터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현재를 순리대로 이를 대하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냥 다니던 회사로 돌아가는 게 아닌 새로운 출발점으로 출근을 대하고 싶습니다. 퇴사를 준비하면서 느낀 것들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수없이 내가 부딪혀야 했던 불안의 정체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느꼈던 절실함과 나의 부족함도 상기시키려고 합니다. 다시 배워야 할 것은 다시 배워 나가고 싶습니다.


  오래 달리기를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풀코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하프 마라톤을 다시 달리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습니다. 온전히 나의 정신력과 힘으로 달려야 하는 마라톤으로 나는 한계에 부딪히며 나아가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처음 오래 달리기를 했을 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다시 느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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