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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킨타 Oct 06. 2021

'워즈워스'의 이해 -여행하며 글쓰기2

트레블링 라이트

  트래블과 라이팅의 결합어인 트래블 라이팅은 오딧세이(Odysseia)가 발간되기 수 천년전, 이집트 왕조(Twelth Dynasty)의 유적에서도 발견될 만큼 인류의 보편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그 이후에도 여행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은 B.C 8세기의 오딧세이를 비롯하여 B.C 5세기의 크세노폰(Xenophon)의 아나바시스(Anabasis) 등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발전하여 왔다. 특히 1780년대 내지 1810년의 낭만주의 시대의 트래블 라이팅은 꽃을 피웠다.   

  여행으로 여행자는 ‘차이’와 ‘타자’를 조우하게 되므로, 여행은 별개와 동일, 차이와 유사 사이의 복잡하면서 미해결의 상호작용을 유인한다. 따라서 트래블 라이팅과 관련된 여행은 공간이동을 매개로 한 자아와 타자(self and other) 사이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트래블 라이팅은 그러한 만남에 관한 기록, 유사성과 차별성 사이의 합의에 관한 기록, 또는 사건의 서술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 트래블 라이팅은 현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장소를 대상으로 할 수 있으며, 그 장르 안에서도 보고서, 저널 등 다양한 방식을 포섭하고 있다(Oxford English Dictionary, 2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 Cdr edition (June 4, 2009)참조). 무엇보다 트래블 라이팅은 여행지에 관한 기록 외에 여행자 자아의 재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여행지의 문화를 표현하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다만 최근에 트래블 라이팅에 관한 비평과 논의가 있게 되자, 보다 정치한 정의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파울 퍼셀(Paul Fussell)은 『전쟁에서의 영문학 트래블 라이팅』(Abroad : British Literary Travelling Between the Wars, 1980)에서 트래블 라이팅에 대한 학제적 비평을 시도하였다. 이어서 『트래블 라이팅의 노턴 앤소러지』(Norton Anthology of Travel, 1987)에서 여행과 트래블 라이팅에 관한 학문적 논의를 소개하였다. 퍼셀에 의하면, 트래블 라이팅은 트래블 북으로 명명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하면서 탐험기 또는 여행가이드와는 구별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트래블 북이야말로 진정한 트래블 라이팅이라고 하면서, 여행자의 자전적 서술과 타자 등에 대한 여행자의 경험의 기술을 내용으로 한다고 한 것이다. 트래블 라이팅이 자아의 재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모리스(Morris)는 『베니스』(Venice, 1960)에서 자기 재현을 구현하고 있어, 『베니스』는 작가의 정보가 드러나고 간접적으로 여행지에 관한 관찰의 산출물이라 할 것이다.

  현대에 쏟아져 나오는 트래블 라이팅은 매우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탄력적인 장르이다.  Norman Lewis, George Monbiot 등의 현대 트래블 라이팅은 여행지에 대한 조사는 물론 독자를 즐겁게 하는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18세기 전의 여행기는 주로 항해와 여행(voyages and travels)을 다루고 있었다. 당시의 트래블 라이팅이 비인칭이며 자아를 재현하지 않았던 증거이다. 요컨대 18세기를 기점으로 트래블 라이팅의 정의 또는 특질에서 차이가 노정되었으며, 퍼셀의 트래블 라이팅은 18세기 이후의 그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여론으로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처럼 트래블 라이팅의 범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이야기는 트래블 스토리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쓰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 될 수 있으므로 모든 쓰기가 트래블 라이팅이 된다고 한다.        

  메리 켐벨(Mary Campbell)가 트래블 라이팅에서의 여행지의 묘사가 일반적으로 진실을 추구한다(non - fictional)고 주장하고 있더라도, 실제의 트래블 라이팅의 묘사는 사실인 사건과 상상으로 구성된 사건을 그 대상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트래블 라이팅의 모든 사례는 여행자인 화자 또는 출판업자에 의하여 해석된 텍스트상의 가공물이다. 여행자의 경험은 여행 텍스트로 형상화 되며, 자연스럽게 그러한 작업은 크든 작든 상상의 방법으로 텍스트에 용해되어 간다. 그 결과 트래블 라이팅에서 필요사항이 누락되는 경우 또는 위탁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때로는 여행기의 저자는 조우한 사건 등을 보고하기 보다는 보다 생생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이야기(telling)하기 보는 보여주는(showing) 방식을 선호하기도 할 것이다. 여하튼 모든 여행기 등에서 어느 정도 가공된 내용의 존재는 불문가지이다. 여행기의 저자가 허구의 사실을 이용하는 범위에 관하여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예컨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Utopia) 의 경우 그 범위가 넓다. 그렇더라도 현재 사실과 허구의 간극이 희석되고 있음은 트래블 라이팅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여행기 문학의 영역에서 관찰과 표현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향이 자리잡고 있음이 간취되고 있다. 예컨대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의 《파다고니아》(Patagonia)가 그것이다.

  만약 사실만을 대상을 한 트래블 라이팅이 있는 경우 그 내용은 단순하고 묘사를 위주로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 착안하여 퍼셀은 트래블 라이팅은 사실과 허구 사이의 창조적 중재라고 하였다(1980 : 214). 여행기가 회고록의 아종(sub-species of memoir) 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목이다.        

  무릇 트래블 라이팅은 여행지의 소식 및 거기의 장소와 사람에 관한 정보를 전달함을 기본으로 한다. 그렇더라도 실제의 여행지와 트래블 라이팅에 묘사된 여행지 사이에는 다층의 조정이 있기 마련이다. 트래블 라이팅에 묘사된 장면과 사건은 여행자의 의식과 쓰기를 통하여 여과되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즉 여행의 경험(travel experience)은 여행의 텍스트(travel text)가 된다. 따라서 트래블 라이팅은 여행지의 문화를 전달하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여행지의 문화를 번역해가고 있는 문화번역의 텍스트임을 전제로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맥락들이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타자에 관한 여행자의 경험들에 대해 작가적 기호와 일반적 요건에 따라 우열을 정하는 선택적 과정을 반영한다. 그 결과 트래블 라이팅은 세상의 일부만을 제공하거나 복잡한 실제의 불완전한 부분에 대한 묘사를 하는 등의 왜곡을 작출한다. 이론에 의한 대상의 체계적인 왜곡을 보여주는 증상적 텍스트의 일종이다. 이러한 왜곡에 착안하여 Pattick Holland and Graham Huggan은 트래블 라이팅을 ‘사실적 재현의 허구들’(fictions of factual representation)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이드의 독해는 트래블 라이팅을 역사적 사료가 아닌 텍스트로 읽으면서 서사적ㆍ수사적 전략과 효과를 분석하는 방식을 전범적으로 보여주었던 예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국주의자들은  전략적, 경제적, 문화적 영역에 걸쳐 자신의 목적에 충실한 정보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당시 여행가가 제공한 묘사와 그러한 묘사가 바탕이 된 사실은 어느 정도 부합되었다. 이 경우 여행기는 단순히 허구라고 할 수는 없게 되며, 그러한 측면에서 트래블 라이팅은 일종의 인식론의 범주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16세기 탐험가 장 드 레리(Jean de Léry)가 『브라질 항해의 역사』(Histoire d'un voyage fait en la terre du Bresil)에서, “나의 의도는 --- 스스로 경험하고 보고 듣고 관찰한 것을 발표하는 것이다.---”는 개인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검시의 원칙(autoptic principle)을 주장하였다. 그 영향으로 일군의 트래블 라이팅에서는 1인칭의 화자가 사용되었다. 이로써 묘사되고 있는 여행지를 현실적으로 방문한 사람이 텍스트를 작성하고 있다는  수사학적 기능이 수행된다. 이러한 기능에 관하여 독자가 여행자에게 일정한 사항을 보고할 것을 신탁(trust)하였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물론 여행자가 그러한 신탁의 특권 내지 목격자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한편 여행가에는 새로운 여행지에서 민족적 차이 그리고 종전의 예상을 유월하는 포괄적인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메리 켐벨의 주장처럼, 경이로서 표현된다. 당시 트래블 라이팅에서 경이는 장면의 재현 또는 비유 등으로 구성되었다. 트래블 라이팅에서 여행자와 타자가 만나는 접점에서 상이한 문화의 충돌 또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발생하기도 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여행가로서는 타자에 대한 경이를 느끼게 된다. 이는 독자의 수요를 의식한 여행자인 저자의 재현적 전략이기도 하고, 수사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근대적 서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은 『잃어버린 대륙』 (The Lost Continent)에서 한편으로는 작가의 시골마을에 대한 망연한 편력,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민감한 다른 종류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두 개의 여행과 담화는 브라이슨에게 그의 고향에 대한 싫증과 죽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환기시켰다. 그 작품에서는 작가의 문학적 여행 뿐만 아니라 감성적이고 육체적인 여행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트래블 라이팅은 사건의 서술이면서 아울러 담론적 구성물인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인 해명은 일찍이 노르만 더글라스(Norman Douglas)이 여행을 외부적인 여행과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여행으로 구분한 사실에 뒷받침되고 있다. 이어서 비․평적인 의제 또는 자전적인 서술로도 설명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트래블 라이팅은 여행자가 타자와 만나는 접점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기록이며, 그 접점에서 여행자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인식한다. 그런데 여행자와 타자의 관계는 A와 B의 그것이 아니라 A와 -A이라는 견해에 의하면, 여행자와 타자의 만남은 주체와 주체의 관계에서 주체의 자기 확인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15세기 이후 낯선 세계에 관한 트래블 라이팅이 출판되면서, 비서양 타자에 관한 관심이 환기되었다. 유럽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지의 세계 내지 푸코적 이질 공간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타자성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유럽은 당초 타자를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기독교 개종의 목적으로 접근하였다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면서 인종의 우열을 진화론적으로 구분하고 유럽인에게 비유럽인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여행기 저자의 시선이 정복의 시선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 와중에 19세기 후반까지의 트래블 라이팅은 불가사의한 타자를 직접 가서 보았다는 경이로운 목격담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 후 과학적 트래블 라이팅의 시대가 전개되어, 여행자의 시선은 과학적 객관성이 담보되어 있는 자신감 넘치는 시선으로 되었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유럽공동체 의식이 강화되거나 유럽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타자의 위상에 변화가 도래하였다. 과거에 타자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거인으로 인식하던 유럽인은 오히려 이제 자신이 난장이임을 인식하게 된다. 식민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 근대에서 탈근대로 이행하면서 겸손의 담론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챠알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스탕달(Stendhal),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문학적 트래블 라이팅이 등장하였다. 충실한 사실의 기록이나 목격담 보다는 작가의 상상력과 환상이 투영된 문학적 트래블 라이팅이 여행담론이 된 것이다. 더욱이 발견될 타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에 따라 트래블 라이팅에 문학성과 주관성이 강조되고, 타자에 대한 놀라움이 작가의 주관적 내면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는 세계의 변이가 있다. 그 변이의 과정에 여행자가 타자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방식의 변화가 아울러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공통적으로 여행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특정 이념이 탑재되어 있다. 예컨대 여행지의 정체를 밝히려는 계몽적 이념 또는 서양문화의 근원을 이해하려는 자성 등이 그것이다. 여행자에게 동양은 “단순한 장소라기보다는 하나의 ‘토포스(topos)’이고 특징된 요소의 집합이다”.라는 사이드의 주장도 그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트래블 라이팅에서 사건의 진술과 관련하여 통일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개연성의 원칙에 따라 잘 짜여진 플롯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비통일적인 관점은 담론적 통제에서 벗어나거나 플롯의 개연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건의 서술에 불과하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타자의 ‘재현’ 방식이 타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재현’과 ‘권력’의 논의가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나아가 더글라스 로빈슨(Douglas Robinson)은『번역과 제국』(Translation and Empire)에서 기본적으로 번역이 종종 제국의 중요한 채널로서 기능해 왔다는 데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포스트식민주의의 연구는 이분법의 해체와 혼종화를 통해 서구를 중심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점에 그 핵이 있다고 한다.      

  대체로 트래블 라이팅에는 타자의 화자에 대한 응시의 장면이 존재한다. 타자의 호기심의 발로로 여행자가 오히려 대상으로 보일 수 있으며, 이 때 여행자는 탈주체화 된다. 응시하는 타자에는 여행자가 판단가능한 상대적 타자와 그렇지 못한 절대적 타자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타자에 대한 지식과 실제로서의 타자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시가적 환상(optical illusion)은 절대적 타자를 과잉으로 생산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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