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가슴 아팠던 시월이 지났다. 아픈 기억을 세월의 나이테에 또 내 마음속에 조용히 묻는다. 마치 푸르던 나뭇잎이 화려한 단풍이 되고, 쓸쓸한 낙엽이 되어 거리를 방황하다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은 늘 스스로 그렇게 소리 없이 시간 속에서 제 할 일을 하며 쉬지 않고 돌고 돈다.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는 묘한 마법사다. 시간 속에 정답이 있다고 한 말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실감하게 된다. 어려서는 시간 가는 것이 너무 늦었다. 빨리 어른이 되면 좋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고 삶이 지치고 어려울 때가 되니, 부모님 밑에 있었던 어린 시절을 그리게 되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욱 그리워지나 보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늘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까지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던 시간도 지났다. 올해는 오르지 아내와 단 둘이서 맞이하는 첫가을이다. 넓은 집안 거실이 왠지 휑하다. 단풍이 낙엽 되어 떨어진 것처럼 허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게 한 고비 살아 냈구나 하는 안심과 함께 허전함과 쓸쓸함이 밀려온다.
아이들이 취준생일 때 가끔 내 서재방에서 악기 연습을 하면 아내는 여지없이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다 떠난 지금은 아무리 해도 잔소리가 없다. 이 좋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본다. 이제부터는 진짜 내 시간이다.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오르지 나에게 집중할 시기가 온 것이다. 어느 철학자가 백 년을 살아보니 60~75세가 가장 좋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바로 그 시절에 접어들고 있다. 그 철학자는 왜 그 15년의 시간을 인생의 가장 황금기라고 했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분은 이 시기를 정신적 성숙과 자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 시기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립을 하고, 오르지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기. 즉, 자기의 목소리에 가장 집중하기 좋은 시기이다. 젊어서 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미루어 놓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도전해 보는 시기다. 무엇을 새로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은 시기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많다. 내 삶을 되돌아보고 무엇인가를 도전하기에 딱 좋은 시기다.
휴일 아침 아파트 정원 산책길에서 만난 나무들은 하나같이 분주했다. 짧아진 낮의 길이와 조석으로 쌀쌀한 기운이 온몸을 파고든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빨갛게 물든 단풍잎들을 보며, 마치 지금 내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봄부터 가을까지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한 여름의 무더위와 천둥과 번개 속에서도 앞만 보고 달렸다. 이젠 실한 열매를 한 아름 키워내고 각자 떠나보낼 시간이 되었다. 나도 아이들이 직장을 찾아 각자의 삶을 위해 떠났다. 아이들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금껏 잘 참고 견디어 온 것에 감사하다. 부모의 뒷바라지도 중요하지만, 자기의 삶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요즘은 아이들이 각자 선택한 길에 만족해하고, 그 일을 통해 보람과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니, 부모로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 가끔 흔들리고 지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 하다 마음이 아팠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강조하고, 든든하게 믿어주고 기다려 주었던 시간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겠는가. 바람 불 때는 함께 흔들리고, 비가 올 때는 비를 맞기도 하며, 낙엽 지는 거리를 걷기도 하고, 함박눈을 맞으며 걸을 때도 있다. 포기하지 않고 걷다 보면 내가 원하는 곳에 누구나 도달하게 된다. 원하는 직업을 찾아 취업을 하는 것이 다는 아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함께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서 사회와 조직에 기여하고 삶의 보람과 행복을 찾아야 한다. 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려야 한다. 모든 과정이 쉽지 만은 않다. 그러나 자연이 그렇듯이 우리네 삶도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지금껏 물이 흐르듯 시간과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며 잘 살아왔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점검하며 가야 한다. 단풍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나면, 속이 훤히 보이는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나도 앙상한 가지로 남은 세월을 살아가야 한다. 화려했던 잎을 잃었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화려하고 힘들었던 날들을 또 한 겹의 나이테에 새기며, 다가오는 내일을 희망으로 살아가야 한다. 계절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단풍과 낙엽은 나에게 속삭인다.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고... 내일은 분명 더 좋을 거라고... 오늘이 좋다.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