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비된화살 Aug 08. 2023

과거가 그리운 사람 미래가 설레는 사람

[미래가 설레는 사람]

 

  꽤 오랫동안 거래했던 컴퓨터 업체 사장님과는 한 살 차이가 난다.

나는 70년생 그는 71년생


한 달에 한두 번 컴퓨터  a/s차 방문하면 바쁜 업무가 없는 한 이런저런 안부를 묻곤 한다.

자녀 이야기, 사는 이야기, 컴퓨터 관련 이야기를 나눈다.


직업상 어린이집에서만 일하다 보니 갇힌 사고를 하기 십상인 나에겐 다른 업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는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


몇 년 전,

50세를 맞이하며 사장님에게 벅찬 듯이  50세가 된다는 게 참 좋다며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고 했다.

그는 토끼눈 마냥 눈이 동그래지며 커진 눈으로 나이 먹는 거 좋다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신기한듯 쳐다본다.


“아니~~ 내 일 하면서 적당히 나이 든다는 거 너무 좋잖아요~”


그러나 사장님은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본인은 20대로 돌아가면 좋겠단다. 20대만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텐데 지금은 할 수가 없다고...

그는 옛 일을 추억하며 그렇게 먼 산을 한동안 쳐다봤다. 진심인 거 같았다.


나는 20대로 돌아가기 싫다. 물론 나도 진심이다.


그렇게 둘은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며 한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한 사람은 미래를 설레어했다.

어떤 게 옳고 그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마다 생각과 지나온 환경이 다르니 누구 이야기가 더 맞는 말인지, 누구 말이 틀린 건지 중요하지 않다.    


 

[지독히 가난했던 유년시절]


나는 목사인 아버지와 유치원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70년대에 서울의 작은 동네인 개봉동으로 이사 왔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목회를 하셨고 어머니는 유치원을 운영하셨다.

지금이야 유치원 하면 큰 건물에 넓은 대지를 연상하지만 그때만 해도 조그만 상가 건물에서 운영하는 많았다.


같은 장소에서 평일에는 어머니가 유치원을 하셨고, 주일에는 아버지와 몇 안 되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매일 피아노를 치며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시며 가나다라를 가르치실 때 막 일곱 살 된 나는 아이들과 대장 노릇하며 노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지금도 어머니 말을 빌리자면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방금 전까지 신나게 대장 노릇하던 아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시며 웃으신다.




나의 유년 시절은 참 가난했다.

어머니는 유치원으로 돈을 버셨지만 아버지는 목회로 인해 전혀 경제활동을 못하셨기 때문인 거 같았다.


우리 가족은 밀가루 반죽을 해서 만든 수제비를  자주 해 먹었다, 거기에 감자를 넣은 날은 특별한 날이었고, 감자가 없는 날은 평범한 날 중의 하루였다.

밤이면 ‘유단포’라는 번데기처럼 생긴 넓적한 철통에 뜨거운 물을 담아 이불속에 넣고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며 방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겨울밤을 보내곤 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하면 그때의 기억이 슬프고 아파야 하는데... 참 이상하게도 포근하다.

그때 오빠와 남동생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절로 나온다.


불어 터진 수제비를 건져 꼬들꼬들하게 말려 프라이 팬에 기름 둘러 볶아 먹던 일,

김치 송송 썰어 꾹 눌러 짜고, 노란 콩을 푹 삶아 절구로 으깨 넣어 빚은 만두로 끓인 만둣국을 먹던 일, 집 앞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하며 꽥~~ 소리 지르며 달아나던 일...

 

어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부지런했다.

그 옛날에도 일본어 공부에 열심이셨고, 늘 새벽을 깨우며 오빠와 나 그리고 남동생을 교회의 테이블에 앉혀 놓고 그날의 숙제와 준비물등을 챙기도록 하셨다.

그리고 가장 예쁜 접시에 계란프라이를 해서 우유와 함께 아침으로 주셨다. 물론 계란프라이는 딱 한 개만, 그리고 우유는 커피 잔에 딱 3/2 정도만 허락되었다. 그럼에도 그때의 그 심리적 부유함은 지금의 그 어떤 부잣집의 아침과도 바꿀 수 없는 유산임을 다 큰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린  책을 읽으면 무조건 용돈을 받았다. 한 권에 10원


난 그때 어른들이 읽는 문학 집을 읽었고 소설을 읽었다.

비록 사용할 돈이 부족하고 풍족하게 먹고, 마시진 않았지만 집에는 늘 책이 가득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었으며, 엄마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다.


‘공부하라’는 잔소릴 하지 않던 엄마는 그저 우리와 함께 공부했다.

그래서일까? 우린 엄마에게 ‘공부하기 싫다’고 한 번도 대든 기억이 없다.

엄마는 그렇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줬을 뿐이었다.




[20대-연애 그리고 도피처로 택한 결혼]    

    

20대는 참 치열했다.

공부에 그리 관심이 없던 나는 공부보다는 노는 것에 더 열심을 내었다.

여러 번의 연애도 했고, 여러 번의 실패도 맛봤다. 또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졸업한 후 유아원(어린이집의 모체)을 운영하다 경영 악화로 그 나이 또래가 생각도 못할 정도의 빚도 져봤다.


20대 중반이 되어서는 도피처가 필요했다. 아는 교회 목사님 소개로 그렇게 계획 없던 결혼을 했다.

문화가 다른 시댁에서 시할머니, 시부모, 그리고 시동생, 남편과 살면서 경제적인 이유 말고도 자라온 환경과추구하는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이렇게 살다가 이혼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지옥을 경험했다.  



 

[30대-워킹맘으로 살아가기]  


30대는 더 치열했다.

아이가 커가며 일과 육아를 병행했던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분주함과 체력의 고갈로 점점 소진되어 갔다. 엄청난 삶의 무게감으로 인해 직업의식 마저 흔들렸고, 워킹맘의 고단한 삶으로 인해 바닥을 치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어 갔다.


누군가의 육아 도움 없이 직장을 다니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슬픈 일인지 체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출근은 해야 하는데 아이는 옆에서 열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얼굴에 눈물을 바르는지, 로션을 바르는지 알 수 없는 액체를 미친 듯이 발라댔다.


그리고는  약 한 봉지 들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 후 나는 나의 어린이집으로 출근했다.


감당할 수 는 슬픔과 분노가 저 밑바닥부터 왈칵 올라왔다.  



  

[40대-터널 끝이 보이는가?]


40대는 긴 터널 같았다.

터널 진입 후 언젠간 끝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작은 점처럼 동그랗게 보이던 터널 끝의 빛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나의 불투명한 미래가 날 더욱 불안하게 했다.


‘이러다 내 인생이 그냥 끝나는 건 아닐까?’


하나님께 원망도 했다. 날 그냥 이렇게 내버려 두시는 건가요? 이렇게 그냥 숨이 턱에 차도록 하루하루 열심히만 살아야 하나요? 때도 써 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도 없이 그저 매일매일 미친 듯이 직장에 출근하고 퇴근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고, 친정과 시댁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을 무한 반복 했다.

분명 그 시간은 내겐 ‘전쟁’이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나에게 혹독하지만은 않았다.

그 사이 시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했으며 직장에서 중간 관리자가 되면서 내 주위의 축축한 그림자가 하나씩 치워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당당해 지자!'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았고, 억지로 그리고 가식적으로 사는 삶을 내려놓기로 했다.

나답게, 원래의 내 모습대로 살기로 내 삶에 선전 포고했다. 시댁에 하기 싫은 건 싫다고 말했고, 연락 없이 불쑥 방문하지 말라고 했다. 명절에도 음식을 안 할 거라고 했고, 이젠 오지 말라고 했다.


누군가는 되바라진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난 내가 중요 헸다. 내가 살아야 했다. 그래서 나의 내면에 더 집중하며 나에게 충실해 지기로 했다.



 

[바람직한 것과 바라는 것]


지금도 읽으면 저 아래에 있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며 짜릿해지는 글귀가 있다.

철학자 최진석교수님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바람직한 것’과 ‘바라는 것’,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좋은 일과 좋아하는 일’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바람직함’. ‘해야 함’ 그리고 ‘좋음’ 등은 우리의 것으로 존재하면서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비율을 잘 맞추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도록 재단된 이념이지요 기준이고 권력입니다.

이상적인 단계라고 포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바람직함을 정할 때 직접 참여해 본 적 있습니까?


왜 자기가 참여해서 정하지도 않은 것을 위해서 죽어라 봉사합니까?

왜 그것을 자신의 내적 충동보다 더 수준이 좋은 것으로 보십니까?

그것은 권력에 굴복한 것입니다.



    

글귀를 통해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되바라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런 모습이 나이며, 이렇게 사는 게 나 답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결혼 후 20년 하고도 8년이 더 지났다.

 



[50대-이제는 미래가 설렌다 과거를 뒤돌아 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이젠 50대이다.

그렇게 나를 나답게 세운 이 나이를 어찌 가벼운 20대랑 바꿀 수 있겠는가


난 50년을 훌쩍 넘는 삶을 살아가며 고군분투한 내가 기특하고, 대견하고, 그리고 사랑스럽다.

내 얼굴에 책임져야 할 나이를 보내고 12년을 더 살았어도 얼굴에 구김살 없이 마치 태평성대를

누린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로 지금, 여기에 서있다.    

 

먼 산을 바라보던 컴퓨터 사장님은 나이 먹어서 좋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사용했던 부품들을 주섬주섬 챙겨 검정가방에 넣었다. 


그렇다.

사람마다 삶의 여정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미래를 설레어 할 수도 있지            

작가의 이전글 리더의 이름, 바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