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너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_#29 스물아홉 번째 밤
#29 스물아홉 번째 밤_우리 함께 짊어지자
"아들,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왜 그래?"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났어요. 친구가 잘못했는데 같이 혼났어요."
"많이 속상했지. 아빠도 이렇게 속상한데, 괜찮아?"
"속상해요."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네, 그럴게요."
"마음이 괜찮아지면, 우리 같이 이해해 보도록 노력하자."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엉뚱하게도 삼겹살을 떠올렸다.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잘 익어가는 통통한 삼겹살 말이다. 그건 삼겹살을 먹을 때마다 생명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 살아있는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생명을 삼키는 죄책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지.'
우리는 극도로 세분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세밀하게 쪼개진 파편이 되어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각자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 일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가상의 공간 속에서 방구석 여행을 하거나 서로의 일상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더 잘게 쪼개진다는 것은 반대로 우리가 더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즐기고 있는 모든 것들의 발자국을 되짚어가다 보면 우리가 세상 모든 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의도치 않게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 죄는 사회의 분화만큼이나 더 커졌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매개로 누군가에게 죄를 위임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발아래의 현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위임은 죄악시해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죄의 위임이 불가피한 선택이듯 죄의 연대 역시 그러하다. 함께 짊어져야 할 죄가 커졌다는 것은 함께 나누어야 할 죄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의 죄를 함께 짊어져야 한다.
"아들, 친구의 잘못을 함께 나누었다고 생각하면 어때?"
"왜요? 제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언젠가 율이의 잘못도 누군가가 함께 나누어 줄 거야. 그게 조금 더 따뜻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