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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비 Aug 20. 2023

안경

모든 건 너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_#59

#59 쉰아홉 번째 밤_안경


"아빠는 언제부터 안경 썼어요?"

"열네 살인가, 다섯 살인가...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니까 열다섯 살."


"저보다는 많은 늦었네요. 아빠도 눈이 갑자기 나빠졌어요?

"아니. 0.8, 0.9 정도. 많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사실은 그냥 쓰고 싶어서. 그때는 그게 필요했."


"아들, 갑자기 안경은 왜?"

"그냥 저도 눈이 나쁘니까요."


"율이도 언젠간 써야겠지. 언제까지나 교정렌즈를 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안경은  쓰고 싶어요."


"왜, 안경 싫어?"

"불편할 것 같아서요."


"불편하지. 그래도 써야지. 불편해도 잘 보는 게 더 중요하니까."

"아빠는 안경 처음 썼을 때 어땠어요? 불편했어요?"


"그랬지.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는데 나중에는 내 몸 같이 편안해져. 쓰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간혹 안경 쓴 채로 세수를 하기도 하고."

"맞아요. 지난번에 그러셨잖아요."


"율아, 그래도 간혹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게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

"뭐가 낯설어요?"


"내 눈이 동그란 렌즈에 갇혀 있구나. 안경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렌즈 바깥의 세상을 볼 수는 없구나 하는 그런 생각."



저는 종종 '나를 둘러싼 벽'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합니. 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것, 하지만 어떻게 해도 버릴 수 없는 것. 어쩌면 그런 것들이 저의 '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중심'보다는 '주변'에, 그중에서도 가장 바깥에 있는 '경계'에 마음이 끌립니다.


를 둘러싼 벽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벽은 바로 '안경'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존재나 살갗의 색과 같이 애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선택한 최초의 벽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안경을 쓴 건 열다섯 살 3월이었습니다. 안경을 써야 할 만큼 시력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안경을 쓴 이유는 단지 중학교의 거친 친구들로부터 저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에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거친 아이들이 많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싸움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1학년 치고는 덩치가 꽤 컸던 저 역시 싸움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안경을 쓰고 책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안경은 저를 지켜주는 방패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벽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같음'과 '다름'을 구분하는 존재입니다. 색깔, 크기, 무게 그게 무엇이든 같음을 묶고, 다름을 나눕니다. 눈앞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비교와 분류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안경은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안경은 자신의 가두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자기만의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맥락에 따라 시각, 관점, 세계관, 가치관 등으로 다양하게 부릅니다. 안경을 벗으면 세상은 초점 없이 흐려집니다. 그야말로 '혼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더 또렷이 보기 위해 더 진한 색으로 렌즈를 칠하기도 합니다. 렌즈의 색이 진해질수록 렌즈 너머의 세상은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그만 안경을 통해 '같은 세계'에서 '다른 세상'을 봅니. 어떤 이들은 색안경이라는 말로 안경의 존재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견고한 벽을 부수기 위해 세상을 혼돈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벽이 무너지면 우리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야 하니까요. 안경도 필요하고 때론 진한 렌즈도 필요합니다.


고민이 됩니다. 세상을 더 또렷이 보기 위해 렌즈의 색을 진하게 칠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렌즈의 색을 투명하게 바꾸어 가려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말과 행동에는 이미 자기만의 색이 묻어 있습니다. 오늘 밤 아이의 안경을 빌려 써봐야겠습니다.

 


"서양화에서는 사람 그린 그림을 많이 보지만, 동양화에서는 초상화가 아닌 이상 사람을 그린 것이 별로 없다. 동양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개 자연의 일부로서 배치된 인간들이다. 그러고 보면 서양화가는 사람의 위치에서 인물과 자연을 보고 동양화가는 조물주의 위치에서 보는지 모른다."

- 윤오영, <순아>, <<방망이 깍던 노인>>, 범우사, 1976, 69쪽.


위치와 시선에 따라 세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조물주의 시선에서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조물주의 시선에서 세상을 본다면 삶의 태도는 얼마나 달라질까. 조물주의 안경을 상상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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