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동거 13년째
서울생활에서 오롯이 나를 지탱했던 사명감은 단 하나...
바로 내가 나를 온전히 먹여 살리는 것!
23살에 서울에 혼자와 18만 원의 월세를 주고 신도림 인근 옥탑방에서 첫 자취를 시작했을 때
옥상의 주변에서 반짝이는 교회의 빨간 십자가를 세어보며 낯선 도시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내게
아, 이 도시에선 나 혼자구나. 집에서의 어떠한 지원 없이 오롯이 내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건 철들기와 상관없이 매일 다가오는 월급과는 상반된 기분을 갖게 한 월세 입금일은 도시에서의 삶의 동력이 되곤 했다.
2~3년 차가 지나면서 목돈이 마련되고 그렇게 1500만 원 전세에서 넓히고 넓혀 어느 해인가
작은 소형 아파트에서 처음 나만의 독립된 life를 즐겨볼 수 있게 되었을 땐 회사와의 거리가 멀고를 떠나 갖춰진 공간이 주는 아늑함. 인테리어 잡지와 같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따라 해 볼 수 있을 무한한 영역에 퇴근길이 즐겁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일 년이 조금 안되었을 무렵, 대구에서 서울로 직장을 구해 온 언니가 고양이 2마리와 함께 15평 방 2개가 있는 나의 공간에 쳐들어 왔을 땐 20년 동안 따로 살았지만 나름 앞으로 피어날 자매의 정에 더 큰 기대를 품었건만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푸스슥 사라지고 말았다.
일단 반려동물과 살아본 경험이 없던 나로선 밤새도록 울어대거나 털을 무한 날리며 현관에 둔 화장실에 똥을 싸 대는 녀석들이 달갑지 않았고, 한 녀석은 너무 치대어 싫었고 한 녀석은 너무 하악거려 싫었다.(결론은 다 싫었다는 얘기) 더욱이 공간 분리를 했음에도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녀석들에게 소리 지르는 것도 한두 번이고, 매번 일이 발생할 때마다 나를 가해자 보듯 쳐다보는 언니의 눈길도 애정이 차단되는 계기였다.
언니가 고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떨어져 지낸 우리 자매는 살가운 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딱 현실 자매 그대로였다. 집 밖을 나가 있는 언니가 안타까운 엄마는 언니가 올 적마다 있는 것 없는 것 내어주기 바빴고 픽 박한 자취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찾기 몰두했던 언니는 내 물건을 가리지 않고 자취방으로 가지고 가기 바빴다. 어렸을 적엔 다음에 올 때 그 분풀이를 했건만 나이가 들면서 차라는 기동력이 생긴 이후론 집에서 없어진 물건을 찾으러 2시간 거리의 언니 자취방으로 쳐들어 가 갖고 오기 바빴고 그런 오감이 있음에도 언니의 물건 가져가기는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면 오기였는 지, 성격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철이 들어가면서 집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언니가 조금씩 안타까웠고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각자 달라진 경제적 상황에 기울기가 생기더니 언니는 언젠가부터 내겐 안타까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싸움 10년, 안타까움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며 내게 손을 내민 언니에게 내게 남은 감정은 애틋함이었고 혼자만의 독립된 생활은 언니가 자리 잡은 뒤 각자 살 때까지 한정하며 언니의 입주를 받아들였는 데 그 잠깐이 올해로 13년이 되었다.
처음 집은 오롯이 나의 독립된 생활을 누리기 위해 구한 터라 큰 방을 제외하곤 모든 공간이 작아 갑자기 늘어난 두 집 살림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곧 전세 만기가 되어 다른 집을 구해야 할 때 두 집 살림이 들어갈 수 있고, 독립된 구조와 교통편(각자 직장에 대한)이 우리가 옮겨가는 집의 주목적이 되었다.
차라리 부부가 사는 집을 구했더라면 더 편했을까?
아니면 친구랑 사는 집을 구했더라면 더 용이했을까?
경기도 부천에서만 3번의 이사는 모두 각 자의 요구에 맞는 집이 생길 때까지 어렵게 어렵게 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나 언니 둘 중 한 명의 포기가 있을 때 결정되었고 그로 인한 후폭퐁(이사날짜, 이사비용, 이사 후 뒷정리 등)은 고집을 피운 사람의 몫이 되었다. (어느 해의 이사엔 언니가 이삿날 친구 집으로 자러 가는 일이 발생하여 이사진행과 이사 뒷정리는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한 적도 있었다. )
이런저런 우여곡절의 서울 직장 생활 동안 각자의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고 상대방에겐 배려 따윈 없던 자매였으니 주변에서 볼 때 누구 하나 결혼하면 갈라설 것 같았는 데 그 둘이 제주 이주를 함께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놀라움은 당연.
더군다나 그 이주 결정이 여행 가다 눌러앉은 동생을 따라 언니가 내려간다는 것이었으니 얘네들 대체 뭐지? 였을 것이다.
지독하리만치 맞지 않아 상대방을 없는 듯 살았던 우리이기에 다른 무엇도 아닌 제주 이주로의 결정은 '자매라서 역시..'라는 명분을 주기에 적당했으나 결론은 [아무 생각 없이 내려온 동생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 언니]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얼렁뚱땅 내려온 우리이기에 처음부터 무엇을 한다는 목표도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도 없이
언젠가 전셋값으로 세계일주를 떠나자! 고 결심했던 어느 해의 약속을 지키듯 아무 생각 없이 놀며 사는 제주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렇게 제주 이주 8년 차가 되었고 주변에선 여전히 놀라며 물어본다.
'아직 언니랑 살어? 남자친구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