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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Apr 17. 2023

택시비가 아깝더래

그래서 버스 타고 갔대

너: 추상적인 것들에 종속되는 인생이란 얼마나 피곤한가.


나: 무슨 일이야.


너: 우리 커플이 곧 둘 다 무직의 상태가 될 것 같아서 생활 유지에 대한 고민에 억눌리고 있어. 아이들도 이제 더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어가고.. 우리는 소비자 4인, 생산자 0인 가족이라 이제 곧 있는 돈을 까먹게 될 예정이야.


나: 와, 일을 안 하는 건 정말 너무 위험하다 그렇지.


너: 아이들이 바라보는 엄빠는 어떨까. 우리는 그동안 고용된 상태로 일했으니 우리가 일하는 걸 직접 본 적도 없고 부모가 일하다가 관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거야. 부모가 돈을 쓰는 것만 봐왔고 앞으로도 돈은 쓸 테니까.


나: 창업이라도 할 거야? 어찌할 예정이야.


너: 같이 무언가를 할 계획은 없어. 그리고 고용자는 독립성이 매우 떨어지잖아, 모든 것을 맨땅에 헤딩해야 하고.. 더 생각해 봐야지.


나: 맞아. 오빠가 전 회사에 20년은 있었는데도 정말 많이 부딪히더라. End-to-End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큰 그림은 가지고 있지만 각 프로세스에서 다음 프로세스로 넘어가는 세부 절차나 각 프로세스 실행 시 검토 사항 등을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


너: 맞아. 자기 능력을 바로 판매하는 전문직이 아니면 매번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깨달으면서 막막하지. 아.. 소비로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유튜브도, 내가 시청하니까 광고수익이 발생하는 건데 시청자인 나는 왜 돈 안 주는지 열받아, 내가 얼마나 열심인데! 모. 그러고 보니 너는 과외 전문직이네.


나: 남편이 가끔 교육 사업으로 확장하는 건 어떻겠냐고 묻거든, 학원 얘기. 근데 나는 정말 자신 없어서 매번 노노를 외치지.


너: 그래, 완전히 다를 듯. 괜히 전문경영인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지.


나: 그래가지고, 추상적인 것들에 종속된다는 건 뭐야.


너: 아, 요즘 자주 지금 있는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계산하게 돼, 지금까지 소비 수준을 기반으로 대충 나누는 정도지만. 아이들이 커가고 이사도 가야 하고 부모님들은 나이 드시고 그러니까 뭔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게 일어날 거라는 불안이 계속 생기는 거야. 그래서 ‘혹시 모르니’ 돈이 왕창 있어야만 할 거 같고 근데 돈은 없고 그러다 진짜 큰일 날 것만 같고 그래서 자꾸 소비를 검열하게 되고.. 구체적이지 않은 이 상황이 답답해.


나: 아이고 그러게. 돈이 그런 불안을 잠재우는 구체적인 미디어가 되는데 그 불안 자체가 추상적이니까 돈으로 얼마나 환산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거구나.


너: 응 맞아. 지금 수중에 얼마가 있으면 괜찮다는 마지노선을 모르겠으니까 결론은 다다익선, 그러면 결론에 도달을 못하는 거지. 생각해 보면 회사 다니는 동안 뭐가 달랐나 싶긴 하거든. 물론 정기적인 수입이라는 안정감으로 불안을 덮어서 그런 거지 그때도 불안했어. 아이가 자라는 불안, 이사에 대한 불안 등등.. 회사를 다닌다고 특별히 더 넉넉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 상황들이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 것 같아.


나: 그래, 아프면 치료를 통해 회복한다는 구체적인 결과가 있는데 돈은 진짜 애매해. 생존을 결정할 정도의 경제적 상황은 그래도 구체적인 것 같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돈이라는 건 참 애매해.


너: 지금 당장 돈이 없는 건 아냐. 곧 돈이 없겠지. 그럼 돈이 있던 지금까지는 행복했다가 앞으로 돈이 없어지면 힘들어지면 될 것 같은데 그냥 매번 돈에 자유롭지 못한 것도 애매해. 네가 전에 학생 때 처음 과외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고 회사를 다니면서 소득 수준이 올라가는데도 스스로에 대한 쪼잔한 태도가 변하질 않더라, 그런 얘기를 했잖아. 이제와 생각하니 우리는 정말 돈의 규모에 따라 대단한 태도의 발전이 생기질 않나 봐. 계속 일하게 하려는 사회의 채찍질인가!


나: 그 얘기가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 다리를 가는데, 택시를 잡으려다 보니 택시비가 아깝더래. 그래서 버스 타고 갔대.


너: 너무 일어날 법한 일이라 웃기지도 않다 야. 삶에 대한 고민보다 돈이 강해.


나: 우리는 둘 다 해외생활을 하니 연금 때문에 고민이야. 구체적으로 몇 년을 대비해야 하는지 감이 전혀 없어. 이러다 둘 다 백 살 넘게 살면 어째, 진짜 모르겠다. 지금 당장의 소비를 아끼는 게 미래에 대단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데도 신경 쓰인다니까.


너: 진짜 모르겠다. 오래 살까 봐 고민하는 상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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