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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Nov 29. 2022

들어오면 나가는 게 인지상정. 야, 너 감정 너!

가끔은, 짧고 굵게 가보자고!

나: 고백할 게 있는데, 진짜 내 취향은 상관없이 좀 더 멋져 보이는 선택을 한 적이 많아.


너: 누구나 그런 거 아냐? 나는 곰탕을 좋아하지 않다고 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적도 있어. 가만히 있던 곰탕 어리둥절.


나: 나는 덜 짜게 먹는 게 멋지다고 생각해서 곰탕에 소금 안쳐먹었어. 내 곰탕 무슨 잘못.


너: 진짜 우리 어이없다 야.


나: 그동안 월드컵 관심 없다고 말하고 다녔거든. 월드컵이 국가주의의 표출이라고 하니까 그게 안 멋져 보이기도 했고, 다들 관심 가질 때 ‘난 별로 관심 없다’고 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보지도 않았어.


너: 그래, 우리 20대 때 정치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게 쿨 해 보였던 거처럼? 그땐 왜 그랬던 걸까, 미쳤나 봐.


나: 정치 얘기를 안 할 수는 없고 말할 때마다 ‘내가 정치에 관심은 없지만’을 얼마나 붙였는지.


너: 인터넷, 스마트폰의 폭발을 경험하면서 여기저기 후딱 넘어갔지 모. 그럴싸한 비판의 글을 읽으면 단어 몇 개 기억했다가 바로 내 의견인 양 써먹었어. 그래도 더 멋져 보이는 선택을 하면서 자기 취향을 찾아가기도 했으니 퉁치자.


나: 맞아, 그렇긴 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무관심이 쿨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살았어서 더 사회화가 어려운 거 아닌가 싶어. 대체 무슨 공통 관심사가 있어서 핑퐁이 생기겠어, 핑퐁은 커녕 대화 커터지.


너: 그러게. 우리 세대 상당수는 여전히 중립을 외치는데, 한 번 더 대화해보면 중립이 아니라 그냥 관심 없는 경우가 많지.


나: 이번 월드컵에 대해 내 학생들을 관찰해보니까, 개개인의 찐 취향일 수도 있겠지만 관심 정도가 성별로 확연히 다르더라. 생각해보니 우리 때도 남녀로 나뉘었던 거 같더라고. 나는 그게 내 선택인 줄로만 알았지?


너: 나도 관심 없다고 말해왔고 지금도 관심이 크게 없어. 아, 내가 읽은 책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렇게 선택하도록 설계됐어!


나: 남편은 피곤하게 일하고 와서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 경기가 있으면 새벽까지 축구 보느라 늦게 자거든, 침대에 들어오는 것만 봐도 숨 쉬는 것만 들어도 그 팀이 이겼는지 졌는지 알 수가 있어.


너: 네 남편 내 남편이니? 모. 똑같다 똑같아. 피곤하면 -> 잔다, 라는 내 로직에 얼마나 벗어나는가.


나: ㅎㅎㅎㅎㅎ 그니까. 나도 내가 축구에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경기를 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야. 진짜 화나고 골 넣으면 방방 뛰고 그렇게 되더라.


너: 맞아, 보면 그렇게 되긴 해. 선수들이 너무 열심히 뛰고 선수들 관중석 응원단들 무지 간절한 거 보이면 그 감정이 전달되지.


나: 우리 엄마는 경기 내내 묵주 들고 진심으로 기도해, 진짜 웃긴 게 하이라이트 쇼츠에도 기도해ㅎㅎㅎ 성당에서 신부님이 미사 중에 ‘그런 걸로 기도하시는 거 아닙니다’ 강론도 했다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기도해.


너: ㅎㅎㅎㅎㅎ 그 순간의 간절함을 어떻게든 모으고 싶으신가 보다.


나: 내가 요즘 ‘감정’ 그 자체에 좀 꽂혔거든. 왜 어떤 감정들은 계속 남아서 내가 뭘 경험해도 나를 그 감정으로 끌고 가는가, 그런 거. 감정에만 매몰되고 스토리라인이 안 생긴다는 둥, 세계관도 안 만들어진다는 둥 그랬잖아.


너: 그래, 나도 비슷하다고 얘기했었지. 나는 내 감정들을 쏟아내다 보면 패치처럼 내 세계관이 연결될 거 같다고 했고.


나: 맞아 맞아 그랬지. 어제 경기를 보면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하니까, 나는 언제 어디서 감정을 쏟아내나 싶더라. 잊을 필요는 없지만 나를 잠식할 필요도 없는 그런 감정을 꼭 끌어안고 애지중지하는 거 같달까. 자고로 들어가면 나오는 게 순리거늘, 감정이란 녀석은 들어가면 도무지 안 나와. 아니지, 내가 어찌 내보내는 지를 몰라.


너: 아, 너는 스포츠 관람이 감정을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 거구나.


나: 적어도 환기는 되지 않을까, 짧은 사이에 감정이 엄청 높이 올라갔다가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하면서. 희열이나 좌절을 느끼기도 하고 열심히 뛴 선수들한테 감동하면서 졌잘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온갖 감정들이 섞이니까. 내 직접적인 일도 아니니 일상에 타격은 없고 기분만 건드리니 얼마나 좋음.


너: 관중석이나 선수들이 슬로모션으로 화면에 잡힐 때, 고개 살짝 돌린 그 0.1초 안에 온갖 감정이 보여.


나: 감정을 유도하는 시뮬라시옹이라며 그동안 속으로 비웃어왔는데 어제는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장치라는 생각이 들더라, 완전 방송에서 시키는 대로 다 따라 했어ㅎㅎㅎㅎ. 그 순간 같은 걸 느끼니까 화면에 잡히는 모르는 사람들한테 급 친밀감 느끼고 막!


너: 그래. 영화나 독서에서 느끼는 차분하고 여운이 남는 감정이랑 확실히 달라. 순식간에 크게 표현하고 소리 지르고 엔도르핀이 도니까.


나: 맞아 바로 그런 거. 나는, 감정이 오래 깊게 남는 경험만 했어서 짧고 굵게 끝나는 감정도 경험해야겠다 싶었어. 균형!


너: 그래도 너는 덕질을 하고 있잖아. 그것도 비슷한 거 아냐?


나: 그러네. 콘서트 한 번이면 몇 년을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모. 음반 나온다고 하면 무슨 어린 왕자의 여우도 아니고 기다리면서 모든 순간에 설레, 모.


너: ㅎㅎㅎㅎㅎ 그것 봐!


나: 내가 ‘지금의 나는 나를 보호할 정도의 전투력도 장착하지 못해서 자꾸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회피하는 게 아닌가 싶다’면서 잃어버린 공격성을 찾아볼까 싶어 격투기를 봐야겠다고 얘기했잖아. 진짜로 하는 거든 보는 거든 좀 더 공격적인 스포츠에 가까워져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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