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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Jan 16. 2023

방해할까봐 연락하지 못했다면 누굴 위한 건가

쉽지 않은 길에 놓인 기대하지 못한 아이템

나: 친구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를 못 볼 것 같다면서 집으로 귤을 한 박스 보냈어.


너: 너는 중학교 때도 유명한 귤 킬러!


나: 그니까. 나보다 더 내 고민을 많이 했던 오월학 박사 친구. 내가 나름 이번 방문에 파격적인 시도를 했는데..


너: 오, 뭔데 뭔데.


나: 나는 진짜 메시지가 편한 사람인가 봐. 그 맘을 들여다보니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거 같아.


너: 그렇지. 많이들 그러지.


나: 포인트는.. 나는 내가 전화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자꾸 상대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는 거야. 상대가 일하는 도중에 전화를 받으면 흐름이 끊기긴 하겠지. 근데 그 상황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내가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 나 좋게 생각해 보자면 흐름은 끊겼지만 반가운 맘으로 기분전환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너: 음.. 그러고 보면 내가 전화받을 때 방해받는다는 느낌을 항상 받는 건 아니거든, 그럴 땐 전화를 알아서 안 받거나 양해를 구하고 내가 다시 전화하면 되는 거고. 그런데 내가 전화할 땐 방해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지배당하는 거 같긴 하다.


나: 맞아. 그러니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에서도 나는 내가 상대를 방해하는 사람이면 안된다는 조심스러운 맘이 크구나 싶더라고.


너: 그러고 보면 우리 둘도 만나는 약속 직전 ‘너 어디니’ 이런 거 말고 전화통화를 한 기억이 없긴 하다, 그렇지.


나: 그러니까. 그래서 내 파격적 시도는.. 전화하는 거였어. 내 전화가 방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시도야.


너: 대박, 너무 별거 아닌데 넘나 맘먹어야만 할 수 있는 파격적 시도야. 우리가 이렇게 작정하고 약속하고 만나서 수다 떠는 거랑은 확 다르네.


나: 이해해 줘서 고맙다.


너: 그래서, 뭐가 다르디?


나: 응. 메시지는 대부분의 경우에 너무 깔끔하지. ‘나 왔다’, ‘반갑다, 즐거운 시간 보내라, 곧 만나자’


말로 하니까 계획하지 않은 워딩이 튀어나오더라. 내가 ‘나 왔다, 귤은 아직 도착하진 않았지만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마’ 이런 용건을 얘기하다가

‘아니 근데, 이렇게 연락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 베프 관계 잘 유지되고 있는 거 맞냐’ 이런 농을 던졌어.


너: ㅎㅎㅎㅎㅎㅎ 그래.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서 무심으로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지. 상징 뿐이라면 베프랑 유니콘이 뭐가 달라!


나: 그니까. 그랬더니 친구가 ‘야 순위 바뀌기 직전이야’ 그러는 거야! 그것 역시 내 계획에 없던 친구 반응이지.


너: 헙, 야 쫄린다.


나: 농의 형식에 진담을 얹어 티키타카 하는 게 메시지로는 잘 안 되는 거 같아. 메시지는 조심스러운 걸 대부분 다 거세할 수 있는데, 말은 주책스럽게도 튀어나오는 게 있게 마련이더라고. 그리고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도 방해꾼으로만 나 자신을 포지셔닝하는 게 잘못된 거 같단 생각이 들더라.


너: 그래서 여기저기 전화했어?


나: ㅎㅎㅎㅎ 맞아. 원래는 ‘나 간다! 금방 올게!’ 이런 메시지 남기고 슝 떠나는데 왠지 이번엔 전화를 해볼까 싶었어. 그랬더니 진짜로 친구들이 중얼중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라고. 이번 시도로 메시지가 편하더라도 말이 꼭 필요하다는 걸 체감했네. 만나는 거랑 또 다르더라.


너: 너는 브런치 처음부터 수다라는 아이템에 꽂혔어?


나: 원래 뼛속까지 실용적인 사람으로서 쓰고 싶은 것보다 써야 하는 걸 찾아보려고도 했었어. 콘텐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의견을 얹게 될까 봐 알아서 내 말들을 지우게 되더라고. 그러면서 이게 뭘 하는 건가 싶었지.


너: 뭐가 걱정되서 가지를 다 쳐내는 걸까 우리는.. 상대가 나를 오해할까 봐? 오해 좀 하면 안 되나?


너: 그것도 그래. 뭐 ‘쟤가 지금 사람을 죽였다는 건가’ 이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상대의 오해에 자신이 없어서야.


나: 우리는 ‘내 말은 그게 아니라’를 설명하는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가!


너: 맞아. 막상 상대는 ‘그게’ 뭔지 말한 적도 없는데!


나: 그래. 내 선에서 노력은 하되, 상대의 오해는 상대의 자유로 둬도 된다는 확신을 좀 가져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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