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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01화

해미고의 전설

by 허관

44년 전이었으니까 내가 열한 살 때였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부엌 찬장에서 작은 접시를 꺼내 물을 채우고 코를 박았다. 죽기는커녕 시원한 접시 물을 다 마셔버리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엄마가 나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불을 쑤시던 부지깽이로 냅다 나의 등을 후려쳤다.


“이노무자식 지금 뭐하는 짓인겨?”


찰진 소리와 함께 굴참나무 부지깽이 끝에 붙어 있던 잉걸불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버지가 접싯물에 코 박고 죽으라고 해서.”


나의 말에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 작디작은 엄마 몸 어디에 그렇게 긴 숨이 들어 있었나 싶게 한참을 내쉬고는, 엄마는 다시 부지깽이를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부엌에서 뛰쳐나와 곧바로 언덕 넘어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늙은 마술사 같았다. 나의 울먹이는 표정을 보자마자 우리 막둥이를 누가 혼냈느냐고 하면서 가슴에 포근히 안아주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큰엄마와 큰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 품에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할머니 나 진짜 바보야?”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하더냐. 난 지금껏 살믄서 니처럼 똑똑한 앤 못 봤어야.”


“아버지는 내 아이큐가 저 콩이보다도 나쁘니까 나보고 책 보지 말고 농사일이나 도우래. 책 봐야 쓰잘데기 없다고 하면서. 근데 난 일하는 건 싫어. 책이 좋아.”


나는 마루에 누워있는 콩이를 가리키며 울먹였다. 큰아버지는 콩이가 순종 진돗개라고 했지만, 나는 그 당시 이미 콩이가 똥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해 봄, 콩이가 똥을 먹는 걸 내가 직접 봤기 때문이었다. 비록 마른 쇠똥이긴 했지만, 똥은 똥이었다.


“아이큔가 어른큔가가 콩이보다 나쁜 거 하구 책 보는 거와 뭔 상관여? 책 읽는 자식보고 잔소리하는 부모는 부모도 아녀. 내가 니 애비 그냥 안 놔둘겨.”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씩씩거리며 언덕을 넘어갔다. 할머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모를까,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나는 당당하게 할머니 뒤를 따라갔다.


“애가 워디가 워떼서 콩이보다 못하다고 그러냐? 그게 애비란 사람이 할 소리냐?”


“어머니 그게 아니구유. 쟤가 머리가 엄청 나쁘데유. 쉽게 말해서 개만도 못하게 나쁘데유.”


아버지는 가정통신문을 마룻바닥에 펼치더니 ‘87’ 숫자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이게 뭔디?”


“아이큐유.”


“긍께. 아이큐가 뭐간디 쟤를 콩이 보다 못하다고 하는거냐구 이놈아?”


“저도 잘 몰라유. 하지만 선상님이 그랬슈. 쟤 머리가 개보다 더 나쁘다구유.”


선생님이란 말에 할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할머니조차 선생님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 곁에서 우두커니 사태를 지켜보던 엄마에게 할머니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렇지. 쟤가 콩이 보다는 똑똑하단걸 니도 알고 있잖여. 안그러냐 애미야?”


엄마도 아무 말 없이 할머니를 바라보자, 할머니는 주섬주섬 치맛자락을 접어 올리더니 중얼거리며 대문을 나섰다.


“선상님이 그랬다면야. 선상님이. 근데 콩이가 쟤보다 똑똑하다니. 멀쩡하게 눈만 멀뚱멀뚱 뜨고 쳐다봐서 내 몰라 부렀네. 콩아 미안하다.”


나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 이후로 콩이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나보다 똑똑한 콩이에게서 무언가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났을 때, 나는 결국 인정했다. 콩이가 나보다 낫다는 걸.


콩이는 학교도 안 다니고 일도 안 했지만, 엄마는 밥을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똥개 콩이의 진실을 알고,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농사일을 도왔다. 농사일이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봄에 모내기할 때 미끈거리는 논바닥 흙을 밟으면 뱀을 밝는 듯 소름이 돋았고, 한여름 논의 잡초를 뽑을 때면 시커멓고 미끈거리는 거머리들이 종아리에 달라붙어 나를 질겁하게 만들었으며, 가을 추수 때에는 먼지가 땀에 젖은 옷 속으로 파고들어 개미 떼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어 살을 파먹는 듯 따끔거림을 참으며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나는 머슴처럼 일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아이큐 테스트를 했다. 이번에는 더 낮은 ‘83’이었다. 아이큐와 담임 선생님 말씀이 적힌 첫 중간고사 통지표를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지능에 비해 성적이 우수함’


또 아버지에게 된통 혼났다.


“니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난중에는 못따라강께 일찌감치 포기혀고, 중핵교 졸업하고 기술배우든지 집에서 농사를 짓든지 혀. 괜히 숨어서 공부하지 말구. 다 헛짓꺼린 께.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졌단 말 들었지. 그 가랑이 찢어진 뱁새는 어떻게 됐을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궁금했다. 가랑이가 찢어진 뱁새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손바닥으로 나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너 지금 뱁새 가랑이 찢어지는 상상했지? 그렁께 너보고 시절빙신이라는 거야. 애휴!”


질문에 답변하려고 곰곰이 생각 중인데, 그게 잘못이라니, 그게 바보짓이라니.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도 착한 중학생이었다.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았다. 나는 그때의 부조리한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와 선생님이 나를 이상하게 여겼던 건 콩이보다 머리가 나쁜 내가 시험을 잘 봤기 때문이라고.


곧바로, 내가 왜 시험을 잘 봤는지 차분히 생각해 봤다. 특별히 시험공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책을 읽었다.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머릿속에 온통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떠들어 대는 통에 선생님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에 55명 중 52등을 했다. 그제야 부모님과 선생님은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편하게 대했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생활이 편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중2 때 이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걸 터득했던 거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 혼자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에 한동안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수업 시간에 몰래 책을 읽으며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고등핵교 졸업장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유?”


“고등핵교에서 콩 심는 법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뭐라 댕겨.”


엄마의 말씀에 아버지가 획 돌아앉으며 말했다.


“그래도 사내자식인디.”


엄마 말은 나직했지만, 날카롭고 단단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엄마는 조금도 양보할 기세가 아니었다. 끝내는 아버지가 한발 물러났다.


“그럼 해미고등학교에나 가든지.”


“싫어유. 그런 똥통학교 안 다녀유.”


엄마가 가시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결국 나는 해미고에 입학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오해한다. 예수, 부처, 공자 같은 성인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성인들이 무슨 오해를 했냐고? 성서, 금강경, 논어를 펼쳐봐라. 거기엔 오해로 점철된 인류의 대서사시가 적혀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성인들처럼 해미고를 오해하고 있다가 나중에 깨달았다. 해미고가 명문이라는 걸.


호랑이에게는 강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독수리는 높이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듯이 인간에게도 각자 남들보다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인간은 집단생활하면서부터 엄마 친구 아들을 시기 질투하여 타고난 재능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모른 채 살아가는 인간이 동물 중에 가장 불행했던 건 당연하다.


해미고는 인간의 원초적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시기 질투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타고난 재능을 찾아주는 걸 최우선 교육 목표로 삼았다. 오랜 세월 시기 질투에 짓눌려 꼭꼭 숨어 있던 타고난 재능은 자유를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해미고가 그렇게 자율적으로 운영했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누구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누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으며, 답답하면 수업 중간에 교실에서 나가도 선생님은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해미 읍내시장에 오전부터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보고 시장 상인들은 해미고를 깡패 양성소라고 손가락질하곤 했다.


“애비 에미는 뼈빠지게 일해 학교 보내놨더니 저지랄하고 댕겨. 에이 호로자식같은 놈들!”


모내기를 마친 5월 하순에 동네 청년이 찾아와서 입학을 신청하면 받아주었다. 당연히 모내기를 마치고 입학한 학생은 가을 추수기에 보름 정도 결석했다. 이웃들조차 학생인지 농사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분명 핵교 다닌다고 했는디, 이 대낮에 논에서 왜 비료 주고 있는겨?”


대신 철저한 학사관리로 졸업은 쉽게 하지 못했다. 당연히 입학 때는 한 반에 60여 명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절반 가까이 줄어 30여 명이었다. 이를 두고 해미고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은 문제 학생들을 퇴학시켜 졸업생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수군거렸지만, 이 또한 오해였다. 해미고에서는 3년 안에 타고난 적성을 찾지 못하면 졸업할 수 없어 졸업생이 절반으로 줄어든 거였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딱 그짝이네.”


내가 해미고가 영국의 명문 이튼스쿨보다 더 우수했다고 말할 때마다 열에 아홉은 박장대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황당해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공자, 부처, 예수도 이따금 오해하면서 살았는데, 일반인이야 오죽하겠는가.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듯이,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해미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명문고답게 해미고는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드라마틱했다. 해미고는 1971년도에 개교하여 27년간 꾸준히 졸업생을 배출하다가 1998년도에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다가, 1998년에 외환위기라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당연히 아니다. 해미고가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전 국민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건 필요 없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진실은 아무리 숨겨도 숨길 수 없다. 머지않아 해미고는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되겠지.


“야 그래 니 말대로 해미고가 명문이라고 쳐. 그런데 왜 그런 명문 해미고가 사라진거야?”


“모짜르트의 넘볼 수 없는 재능을 질투한 살리에르가 끝내는 모차르트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알아듣는데, 이따금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기득권자들의 시기 질투 때문이라고.”


해미고를 졸업한 지 어느덧 38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리 명문 해미고라고 해도 나는 불완전한 청소년이었던 데다가, 삶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잔혹한 운명의 발톱처럼, 학기 초에 그 사건이 발생했던 거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던 엉덩이다. 뭐랄까? 땅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던 시절이라, 아침마다 보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어색함을 느끼던 때에, 그런 일을 겪으니 더욱 당황스러움에 얼떨결에 나는 그 사고를 저질렀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로 고등학교 3년이 그토록 파란만장하게 흘러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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