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고는 세계적인 명문고답게 입지부터 남달랐다. 뒤로는 가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서해가 넓게 펼쳐져 과연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해미고의 명성을 익히 들은 인근 천안은 물론 서울, 대전, 광주, 부산 등 전국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대도시 고입 연합고사에 낙방한 학생들이 시골까지 찾아왔다며 해미고를 깎아내렸지만, 그러한 평가는 해미고를 질투하던 자들의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당시 해미고의 위상은 실로 대단하여 3학년 학생 대부분은 졸업도 하기 전에 유수의 기업에서 스카우트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에나 낙오자는 있는 법. 해미고에도 가뭄에 콩 나듯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있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2년제 전문대학이었다.
해미고는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지금도 슬프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 추억의 중심에는 대호, 단추구멍, 곱슬, 쿤타가 늘 함께했다. 그중 쿤타는 대호 다음으로 알게 된 친구였다.
“병든닭, 맷집 쓸 만하던데.”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쿤타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주먹도 괜찮고. 더군다나 왼손으로.”
왕눈이와 베어 사건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주먹은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맷집은 비누 거품보다 훨씬 약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왼손잡이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물건을 쥘 때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내 왼손을 때렸다. 당연히 집에서 하는 젓가락질이나 글씨 쓰기와 같은 행위는 모두 오른손을 사용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내가 오른손잡이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믿으시며 흡족해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의식만 훈육하셨을 뿐, 깊숙한 무의식까지는 어쩌지 못하셨다. 왕눈이와의 대립 상황은 나에게 절박감을 안겨주었기에, 왼손이 먼저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외삼촌은 늘 말씀하셨다. 의식은 무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과 같으니, 무의식을 간과하면 불행을 초래한다고.
“너도 유학파라며?”
쿤타가 바로 내 등 뒤까지 다가왔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얼굴은 곱상한데, 저 시커먼 물건 봐. 진짜 물건이네.”
쿤타가 고개를 불쑥 내밀어 나의 은밀한 부위를 빤히 쳐다보며 빈정거렸다. 그 순간 긴장감에 오줌 줄기가 끊겼다.
“짜식 졸기는.”
내가 겁먹은 게 아니라 고추가 겁먹은 거다. 한때 고추는 나의 신체 일부였다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나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잠잘 때 불쑥불쑥 일어나기도 하고, 나보다 백설공주를 더 좋아하는지 그녀만 생각하면 음흉하게 반응했다.
“대호랑 같이 언제 한번 보자.”
쿤타는 나의 어깨를 툭 치며 싱긋 웃더니, 오른쪽 구석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던졌다. 고등학교 화장실에 재떨이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당시 해미고 화장실에는 실제로 재떨이가 있었다. 담배꽁초로 인해 화장실 바닥이 지저분해지자 솥뚜껑과 유사한 용기에 모래를 담은 재떨이를 화장실에 비치했던 거였다.
쿤타라는 별명도 역시 대호가 지어준 것이다. 쿤타는 순수한 한민족 혈통이 아니다. 얼굴은 물론 피부까지 까무잡잡하고, 손바닥은 하얗게 도드라졌다. 쿤타는 ‘쿤타킨테’의 줄임말이다. 쿤타킨테는 당시 인기 있던 미국 드라마 ‘뿌리’의 주인공 이름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미국 땅에서 온갖 고난을 겪다가 마침내 자유를 쟁취하는 흑인 노예 이야기다. 쿤타의 이국적인 외모에 해미고의 명성을 알고 미국에서 유학 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쿤타는 서울 청와대 부근 산골에서 태어난 토박이 한국인이다. 졸업 후 그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행정구역상 서울이었지만 강원도 산골보다 더 외진 곳이었다. 지금은 서울의 대표적 부촌으로 변모했지만 말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쿤타의 외모가 무척 신기했다. 도톰한 입술, 낮고 넓은 코, 새까만 눈썹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물론 검은 피부색과 대비되는 하얀 치아,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잔근육으로 다져진 몸은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쿤타는 항상 자기 몸집보다 더 큰 하얀 나이키 가방을 들고 다녔다. 청바지를 즐겨 입었으며, 청바지 밑단을 일부러 접어 올렸다. 그것이 최신 유행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때까지 쿤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새로 산 긴 바지의 통을 줄이고 밑단을 밖으로 접어 입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가을에 나도 청바지 밑단을 접어 입었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멋있어 보였다고나 할까. 뭐 지금도 세상을 모두 이해하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쿤타는 대호와 동갑이었다. 그러니까 나보다 2살 많았다. 하지만 대호와는 달리 쿤타는 웬만해서는 웃지 않았다. 할 말만 했고, 귀찮은 일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쿤타와 화장실에서 만난 다음 날, 나는 대호의 손에 이끌려 빵집으로 향했다. 대호에게 반강제적으로 끌려갔지만, 백설공주를 본다고 생각하니 속으로는 은근히 설렜다. 나는 대호에게 은근슬쩍 물어봤다.
“말했어?”
“뭘?”
“뭐라니? 그럼 내가 좋아한다는 말 아직 안 한 거야?”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짜식, 생긴 거 답지 않게 성질머리 있네. 했어. 이제 됐냐?”
“반응은?”
“당연히 백설돼지는 니가 싫지 않지.”
대호의 말이 사실이었다. 빵집에 들어서자 백설공주가 나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날 그녀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골이 깊게 파여 더욱 아름다웠다. 나도 손을 들어 인사하려다가 멈칫했다. 눈에 익은 세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쿤타가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면도칼로 얼굴 가죽을 그은 듯 가느다란 실눈에 목이 짧고 어깨가 넓은 친구가, 왼쪽에는 앞머리를 고불고불하게 파마한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단추구멍과 곱슬이야.”
쿤타가 자리에 앉아있는 친구를 소개했다. 정말 일차원적인 별명이었다.
“여긴 병든닭. 유학파끼리 한번 보고 싶어서 모이자고 한 거야.”
나는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단추구멍은 사각형 얼굴에 씨름 선수와 흡사한 듬직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유도를 조금 배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단추구멍이 팝송을 흥얼거리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나 역시 좋아하는 팝송이라 기억했다. 시각 장애를 가진 흑인 가수 스티비 원더의 노래였다. 제목은 영어라 기억하지 못했다. 단추구멍은 서산에서 유학 왔다. 해미와 서산은 약 12km 떨어져 있다. 단추구멍도 나처럼 집에서 통학했다.
곱슬은 해미 읍내에서 자취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곱슬의 자취방이 우리의 아지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곱슬은 키가 매우 작았다. 작은 키에 어깨까지 굽어있었다. 작은 키를 조금이라도 커 보이게 닭 볏처럼 앞머리를 파마했다. 6개월 가까이 자신의 곱슬머리가 자연산이라고 주장하다가 미용실에서 머리에 이상한 물건을 꽂고 있는 그를 쿤타가 보고, 우리가 미용실로 우르르 들이닥치자 그제야 마지못해 인정했다. 곱슬의 출신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서울이라고 했다가, 부산이라고 했다가, 심지어 강릉에서도 살았다고 했다.
곱슬은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희었고, 구사하는 언어의 억양과 어휘가 어딘가 모르게 세련됨이 묻어났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당시 곱슬의 언어가 세련되게 느꼈던 이유는 그가 서울말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행동거지에는 여유로움이 넘쳤다. 곱슬의 실제 나이를 알게 된 것은 그가 해미에서 사라지고 몇 년이 흐른 뒤였다. 하여튼 그때도 나와 나이가 같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곱슬은 한마디로 볼품없게 생겼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곱슬의 곁에는 항상 여자가 있었다.
“야. 반갑다야.”
단추구멍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전형적인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단추구멍이 정겹게 느껴졌다. 그나마 평범한 부류는 단추구멍과 나뿐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둘만 대한민국 고등학교 1학년 평균 나이인 17살이었고, 집에서 통학했다.
대호와 쿤타, 곱슬, 단추구멍과 나 이렇게 다섯 명은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하루에 한 번씩 맘모스빵을 먹고, 곱슬의 자취방에서 뒹굴다가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다 기억하지만, 지금은 차마 떠올리기 싫은 유치한 여자 이야기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로 곱슬이 여자 친구와 교제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경청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몰려다니자, 다른 친구들은 우리 다섯 명을 ‘유학파’라고 불렀다. 나도 얼떨결에 유학파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계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과 어울리게 된 계기는 왕눈이와 베어 사건으로 그들이 나를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싸움을 잘한다거나 맷집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최루 가스 자욱한 곳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이후로 나에게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나의 머리를 때리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나타난 기이한 현상은 어려운 의학 용어로 선천성근긴장증이라고 했다. 이는 특정 염소 품종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으로, 미국의 한 염소 품종의 경우 위협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곧바로 쓰러지는 영상이 널리 알려져 있다.
메두사의 시선을 마주한 그리스 신화 속 전사처럼 즉시 몸이 굳어 옆으로 쓰러지는 염소의 모습이 신기해 매년 기절하는 염소 축제가 개최될 정도다. 나는 최근 인터넷을 통해 이 사실을 접하고 인간의 잔인함에 경악했다. 기절하는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비참한데, 이걸 구경거리로 삼다니. 아무튼, 나는 최루 가스 사건 이후로 사소한 일로 친구와 다투다가 머리를 살짝만 맞아도 곧바로 기절했다. 기절한 시간은 고작 25초로 짧지만,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머나먼 우주로 여행 갔다가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폭력이 일상인 시대였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겁쟁이라고 놀렸다. 나의 이런 증상을 아버지도 알게 되었다.
“나약해 빠져가긴곤.”
아버지는 나 같은 자식을 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외삼촌은 달랐다. 외삼촌은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나쁜 행위라고 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했다. 덧붙여 외삼촌은 내가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폭력차단회로가 있는 것이며, 성인이 되면 내 주변에서 폭력이 사라질 거라 확신했다. 당시 나는 외삼촌을 말이 듣기에는 좋았지만,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때 동화책을 보다가 도깨방망이를 알게 되었다. 나는 도깨비방망이를 간절히 원했다. 도깨비방망이를 내려쳐 내 머릿속 폭력차단회로를 없애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의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던 외삼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도 곧 죽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고, 외삼촌 말처럼 나의 주변에서는 폭력이 사라졌다. 물론, 여전히 저 멀리 지구촌 곳곳에서 폭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