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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03화

백설공주의 파르스름한 종아리 정맥

by 허관

대호가 나를 끌고 간 곳은 해미 터미널 근처 빵집이었다. 몇 번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맘모스 빵하고 우유 두 잔.”


그가 주문하자, 여자가 다가왔다. 얼굴이 하얗게 빛나고, 뒤에는 후광이 비쳤다. 후광이라고?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뒤에 있는 그런 후광 말이다. 어쨌든 내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힐끔거리며 그녀를 훔쳐보는데, 고소하고 달콤한 빵 냄새에 섞여 희미한 물비린내 비슷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그게 수선화 향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쟁반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가슴골이 불쑥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일부러 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시야에 들어온 거였다. 민망함에 얼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 창문에 달린 하트 모양의 조그마한 거울에 새하얀 얼굴이 비쳤다. 거울 속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햇빛을 피하려고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얼굴을 찡그렸다.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연분홍 혀가 살짝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반투명한 하얀 빛들이 일렁였다.


“오빠 잠깐만.”


그녀는 쟁반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대호 뒤로 돌아가 팔을 들어 커튼을 묶은 매듭을 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옷 사이로 도톰하고 하얀 허릿살이 살짝 내밀었고, 풍만한 가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우유를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당황스러움과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분이 뒤섞여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야. 너 우유 좋아하는구나.”


커튼이 가려지면서 강렬하게 스며들었던 햇살이 사라졌음에도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빛났다. 햇살 때문에 그렇게 빛났던 게 아니었다. 한동안 힐끔거리던 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청색 블라우스의 목에 달린 넓고 하얀 옷깃을 보고 처음 보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낯익었던 이유가 떠올랐다. 그녀는 검은 단발에 푸른색 블라우스와 넓은 치마를 입고 있는 백설공주가 확실했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종아리 푸르스름한 정맥을 보자, 갑자기 피에 굶주린 흡혈귀처럼 그녀의 정맥을 빨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아랫도리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내 몸에 달렸지만, 나는 이것이 날뛰기 시작하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100부터 숫자를 거꾸로 세었다.


심장과 아랫도리와 뇌에서는 저 여자를 쳐다보라고 격렬하게 협박하지만, 나는 그들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숫자에 집중했다. 언제부턴가 심장과 아랫도리와 뇌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로 변했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네요. 일학년이세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머리가 격하게 끄덕여졌다. 이런 젠장, 머리조차 내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름이?”


이름을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병든닭이야.”


대호의 무심한 대답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나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분명 웃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야 갑자기 왜 그래?”


항상 실없는 웃음만 짓던 대호가 내 손을 내려다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나도 대호가 보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탁자 위에서 내 왼손과 오른손이 격렬하게 비벼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엉뚱한 상상을 했다. 나는 얼른 손을 탁자 밑으로 숨겼다.


“어디 아파? 얼굴이 왜 그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쟁반을 가슴에 안고 빵 진열장 뒤로 사라졌다.


“갑자기 우유 마셔서 배탈이 났나 봐.”


나조차 내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정도였는데 앞에서 지켜본 대호에겐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나는 얼떨결에 우유 탓으로 돌렸지만, 사실 바가지로 퍼마셔도 고소하기만 한 우유에 배탈이 났을 리 없었다. 그저 적절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상한 놈이네.”


“이젠 괜찮아.”


나는 순간 백설공주와 결혼하여 일곱 난쟁이를 낳는 상상을 했다. 일곱 난쟁이를 낳으려면 최소한 일곱 번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자꾸 나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음탕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다른 생각을 억지로 소환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야 병든닭! 정신 차려! 종이는 왜 뜯어 먹는 거야?”


대호가 포크로 빵 접시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빵 아래 깔린 종이를 포크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있었다.


“누구냐?”


“누구?”


“방금 그 여자.”


“보면 몰라 빵집에서 일하는 애야.”


백설공주가 사라지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맘모스빵을 한 입 먹어보았다. 동네 가게에서 파는 봉지에 담긴 단팥빵과 카스텔라와는 차원이 달랐다. 대호는 빵을 손으로 덥석 집어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켰다. 나는 잽싸게 포크로 네 조각을 찍어서 내 앞 접시에 담았다. 대호는 남김없이 다 먹고 입맛만 다셨을 뿐, 내 것을 빼앗아 먹을 생각은 없다는 듯 희멀건 웃음을 날렸다.


내가 꼭꼭 씹어 빵을 다 먹는 동안, 대호는 자기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배바지에게는 형이라고 부르고, 자기와는 친구로 지내자는 얘기였다. 대호와 나는 두 살 차이였지만, 생년월일을 따져보더니 15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신은 부산 시내에서 태어나 곧바로 출생신고를 했고, 나는 서산 산골에서 한겨울에 태어나 아마 눈이 다 녹은 늦봄에 출생신고를 하여 자신과 나이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억지 논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 맘모스 빵의 고소하고 달콤함에 잠시 흐려졌던 그녀가 나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백설공주는 몇 살이야?”


“미친놈. 내가 백설공주 나이를 어떻게 아냐? 일곱 난쟁이에게 물어봐.”


“아까 빵 갖다준 그 여자.”


대호는 박장대소했다.


“너 취향도 이상하다. 걔가 백설공주라고. 저런 돼지가?”


살이 포동포동하지만, 돼지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은 정말 백설공주처럼 하얗고, 작고 도톰한 입술은 촉촉하게 빛났다. 다만 코가 살짝 들린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렇다고 빗물이 스며들 정도는 아니었다. 내 눈에는 완벽했지만, 대호는 백설공주가 취향이 아닌 듯했다. 아무튼,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대호는 웃음을 멈추고 그녀의 나이를 알려주었다.


“열아홉 살이야. 내 동생.”


“친동생이냐? 닮지 않았는데?”


“친동생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나도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없었기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백설공주는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낮에는 빵집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서산에 있는 패션학원까지 다닌다고 했다. 서산에 패션학원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하긴 내가 패션에 관심 없으니 서산 어느 구석에 하나쯤은 있을 수도.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이스 가방에 당나귀 머리가 붙은 청바지, 그리고 스펙스 신발을 신고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랑 동갑이네.”


“누나거든.”


“좀 전에 네가 말했잖아. 나는 서산 두메산골에서 태어나서 출생신고 늦게 했을 수도 있다고.”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나 소개시켜 줘?”


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잠시 후 탁자를 두드리며 웃었다.


“쟤를?”


나는 대호에게 최대한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다른 모든 부끄러움과 어색함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야 이래서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생긴 거구나. 아무튼, 너도 참 취향 독특하다.”


빵집을 나와서 터미널까지 가는 동안 대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백설공주의 희디흰 얼굴과 종아리의 푸르스름한 정맥만 가득했다. 현실의 나는 여전히 '병든닭'이었지만, 꿈속에서는 그녀의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반짝이는 듯했다.


밤에 꾸는 꿈은 물론, 학교 수업 시간에 잠깐씩 졸면서 꾸는 꿈속에서도 그녀의 새하얀 종아리 파르스름한 정맥이 자주 나타났다. 어떤 날은 그녀의 정맥을 손으로 쓰다듬다가 깨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입술로 정맥을 빨다가 깨기도 했다. 심지어 정맥에서 피가 쏟아져 내 팬티를 적시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꿈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세계로 바뀌어 버렸다.


그날도 그랬다. 꿈속에서 나는 그녀의 정맥을 조심스럽게 문지르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당황한 듯 몸을 돌려 짙은 안개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지 마.’라고 외쳤다.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 눈을 떴다. 100개가 넘는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윤리 담당 베어도 안경 너머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리 나와.”

베어가 당구채로 나를 가리켰다. 잠에서 덜 깬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베어는 맨 앞자리에서 졸고 있던 몰린눈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몰린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베어는 내게 몰린눈의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으라고 했다.


나는 내 잘못을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다음 순간 당구채가 내 허벅지를 내려쳤다. 살에 달라붙듯이 찰진 소리와 함께 짜릿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엎드려 엉덩이를 맞았다면 벌떡 일어나 도망치고도 남을 만큼 아팠다. 하지만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


통증에 얼굴 근육이 모두 일그러졌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문득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허벅지를 아무리 맞아도 죽지 않아’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정신 줄을 겨우 붙잡았다. 통증이 거세게 밀려오다가 점차 감각이 희미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렸다. 나는 눈을 슬며시 떴고, 그와 동시에 베어의 매질도 멈췄다. 내 당나귀 청바지에 검은 물이 배었고 주변에 검붉은 핏방울이 흩어져 있었다. 설마 내 허벅지에서? 아니겠지, 하면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내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그 광경에 머리가 핑 돌았다.


“반항하는 거냐?”


베어의 성난 목소리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꼼짝 못 하고 앉아있었는데, 반항이라니? 어느새 면도 자국이 선명한 두툼한 베어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 주위엔 땀이 흥건해 번들거렸다. 베어의 눈빛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베어는 나를 양호실로 데리고 가더니,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내 허벅지에 반창고를 붙이는 베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를 보고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다.


평소 베어는 수업 시간에 조용히만 있으면 학생이 뭔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잠을 자든 말든, 선데이 서울을 보든, 아니면 소설책을 읽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수업 중에 자신의 목소리보다 큰 소리를 내는 학생에게는 예외 없이 가혹한 벌칙을 가했다. 책상 위에 무릎 꿇린 채, 50cm가량의 당구채로 허벅지를 때리는 벌칙이었다. 때리는 횟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매를 맞다가 참지 못하고 책상 아래로 내려오면 벌칙은 멈췄다. 그의 원칙을 잘 아는 대부분 학생은 한 대 맞고 곧바로 책상 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 원칙을 설명할 때, 나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당구채로 허벅지를 내려쳐도 가만히 있던 나를 반항한다고 베어는 오해했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던 것이었다.


“곰 같은 놈.”


그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왜냐하면 베어는 영락없는 곰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베어일까. 나는 터져 나온 웃음을 애써 참으려 잽싸게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터져 나온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베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두려움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바로 그때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베어도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안 아팠던 거야?”


그의 큰 덩치와 험상궂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른의 진심 어린 말투에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 허벅지 통증이 밀려와서 그 감정이 확 사라졌다.


“아팠습니다.”


“지독한 놈이야. 그 지독함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그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훌륭한 사람이라니? 너무 뜬금없는 말에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당시 나는 그 어떤 ‘훌륭함’과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지독함’과 훌륭함’이라니? 그 조합 자체가 낯설었다.


아무튼 그날 이후 베어는 당구채를 버렸다. 15년간 들고 다니던 당구채를 소각장에 가져가 직접 불태웠다고 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나에게 말했지만, 당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베어는 윤리 선생님이다. 윤리 과목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하지만 베어의 외모는 인간보다 오히려 곰에 가까웠다. 손등과 팔뚝에 굵은 털이 무성했고, 오후만 되면 얼굴에 검은 수염이 자라나 정말로 곰으로 변하는 건 아닌지 하는 엉뚱한 상상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자기의 외모를 감추고자 그는 항상 머리를 포마드로 말끔하게 빗어 넘기고, 빳빳하게 다린 하얀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착용했지만, 그의 타고난 곰 같은 모습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와이셔츠 소매 끝이나 깃 사이, 심지어 콧구멍에서 불쑥 삐져나온 털은 분명 야생의 곰 털이었다.


허벅지 사건 이후로 베어는 나를 보면 친한 척하며 장난쳤다.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나에게 다가와서 발을 슬쩍 밟거나, 나의 짧은 구레나룻을 잡아당겨 깜짝 놀라게 하여 깨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가 눈을 흘겨보아도 못 본 척 태연하게 지나쳤다.


“허리 안 아파? 종일 누워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말이야. 너는 보면 볼수록 매력 있단 말이야. 너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개보다 머리 나쁜 내가 훌륭하다고? 그의 뜬금없는 칭찬이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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