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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05화

성벽 틈에 핀 노란 민들레

by 허관

개나리가 지고, 목련이 활짝 피었다. 백설공주의 유일하게 한가한 시간이 일요일 오후라고 대호가 알려주었다. 일요일에는 빵을 오전에 한 번만 굽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벼르고 벼려 일요일 오전 11시 정각에 빵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손님이 없었다. 드디어 둘만의 시간이었다. 가슴이 설렜다. 무슨 말을 건넬까?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백설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오늘 바쁜데.”


잔뜩 부풀었던 마음이 터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 역시 백설공주가 학원과 빵집 일, 방송통신고등학교 공부까지 모두 하느라 몹시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라고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종일 멍하니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빵집을 나왔다.


“야 뭔 남자가 그리 싱겁냐. 읍성에 갈래?”


그녀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무심하던 말투와는 달리, 이번에는 들뜬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앞치마를 벗고 창문에 걸린 하트 거울을 쳐다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바쁘다고 하더니, 갑자기 읍성 데이트를 제안하는 예측 불가능한 그녀의 모습까지 사랑스러웠다.


“성벽 위를 한번 걸어보고 싶었어. 그런데 혼자 걸으면 남들이 이상한 눈으로 볼 까봐 한 번도 실행한 적은 없어. 같이 가자.”


해미읍성 서문은 해미고 정문과 이어져 있고, 남문은 읍내 시장과 연결 되어 있었다. 해미읍성은 해미고 제2의 운동장이자 현장학습 터였으며, 밤만 되면 은밀한 사랑이 꽃피는 장소였다. 우리는 남문을 통해 읍성 안으로 들어갔다. 완만한 잔디 언덕을 올라가자, 성벽 길이 나타났다. 나도 역시 읍성 안에서만 뛰어놀았을 뿐, 성벽 위를 걸어 본 적은 없었다. 어른들과 연인들만 성벽 위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성벽 돌 틈 사이로 노란 민들레가 피어있었다. 어느새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은 그녀의 얼굴은 독 사과를 먹고 잠든 백설공주처럼 창백해졌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대. 단지 십자가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둘 다 이해할 수 없어. 그냥 십자가를 밟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밟지 않고 죽음을 택한 사람들과, 십자가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죽인 사람들 모두 말이야. 너는 이해할 수 있니?”


해미읍성은 천주교순교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이해할 리가 없다. 나의 침묵에 백설공주는 읍성 안을 바라보며 잔디밭에 앉았다. 나도 그 옆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저 나무에 목매달아 천여 명을 죽였대.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개울을 이루었다니, 끔찍하지 않아?”


그녀가 바라보는 건 읍성 중앙에 있는 회화나무였다. 해미 사람들은 흔히 그 나무를 읍성 고목 나무라고 했다. 해를 등지고 앉은 백설공주의 눈은 깊게 그늘져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읍성 북쪽 언덕 위에는 영산홍이 붉게 피었다. 화사한 봄날과 어울리지 않는 대화였다.


“나뭇가지에는 아직도 그 당시 목을 매달기 위해 줄을 걸었던 흔적이 남아있대. 죽은 자나 죽인 자나 모두 신의 존재를 믿었음이 분명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에 저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그들은 신을 두려워했던 거야. 모든 생명체는 두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잔인해지지. 저렇게 잔혹하게 죽였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거야.”


백설공주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산과 들은 온갖 꽃과 새순으로 싱그러웠던 봄날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종교 이야기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나는 무의미에서 벗어나고자 하늘을 봤다.


“저 구름 좀 봐. 멋지지?”


“멋진 게 아니라 예쁜 거 아냐?”


멋진 거나 예쁜 거나. 문득, 어이없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자 사라졌던 어이가 다시금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녀의 어두웠던 표정이 다시 밝아졌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대로 무의미의 수렁에서 벗어나 구름에 반한 얼굴이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구름이었다. 흔히 뭉게구름이라 부르는 적운이 가야산 정상에 걸려 있었다. 가야산 해발고도는 677m다.


“지금 산 정상에 올라가면 안개가 자욱할 거야. 구름이 땅으로 내려오면 안개고 하늘에 떠 있으면 구름이지.”


“이리 맑은데, 저기엔 짙은 안개라니. 가보고 싶다. 구름을 밟아 보고 싶어.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겠지?”


“글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구름도 밟으면 뭔 반응이 있지 않을까? 언제 한번 구름 밟으러 올라가자. 날씨가 따듯해지면 자주 가야산 정상에 뭉게구름이 걸릴 거야.”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하얀빛이 일렁이는 듯했다. 다행이다. 나는 다른 구름을 찾았다. 마침 상층에는 낚시 모양의 구름이 흩어졌다. 나는 그 구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음 알갱이들이 강풍에 날려 갈고리 모양이 만들어진 거야.”


“저게 얼음이라고? 이렇게 따뜻한데.”


“저긴 고도가 8,000m쯤 돼. 영하 50도 가까이 될 거야. 남극 추위를 느껴보려면 남극까지 갈 필요 없어. 서산 가는 거리만큼 하늘로 올라가면 남극보다 더 추워.”


“난 매일 서산을 오가는데, 저곳은 평생 못 가보겠지. 너 구름 좋아하는구나?”


“난 구름을 보면, 구름이 입체적으로 보여. 아주 특이한 눈을 가졌지.”


“입체적으로?”


그녀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햇살 때문인지 콧살을 찌푸렸다. 깊어진 두 눈구석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저 가야산에 걸린 뭉게구름은 약 600m이고, 지속적인 비를 뿌리는 구름은 약 1,500에서 3,000m 사이에 있어. 여름철 웅장한 적란운은 지상에서부터 12,000m까지 솟아올라 구름 중에 키가 가장 커. 그리고 각각 높이마다 구름 모양이 다 달라. 상상 해 봐.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선 감탄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듯한 호기심이 엿보였다.


“너는 무슨 구름을 좋아해?”


“종일 비를 뿌리는 구름이 좋아. 세상을 아늑하게 만들잖아.”


“그 구름을 난층운이라고 해. 온 세상을 암흑기로 몰아넣는 구름이지. 장마 때 지루하게 비를 뿌리는 구름, 난 그 구름이 제일 싫어.”


순간 후회감이 밀려왔다. 백설공주가 좋아하는 것을 나는 그만 싫어한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야 우리 절에 다닐래?”


간신히 종교 이야기에서 벗어났는데 또다시 백설공주는 그 수렁으로 빠져들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녀는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기댈 든든한 뭔가를 찾다가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지만.


“뭐야 천주교 이야기하다가, 구름 이야기하다가, 이젠 절이라니?”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구름이나 그게 그거 아냐?”


“그게 그거라니?”


“모두 허황하다고.”


“하느님과 부처님과 구름이 나라고?”


갑자기 백설공주가 가시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 별명은 병든닭이고, 이름은 황, 본관은 양천 허씨다. 허씨 집안은 이름이 외자로 많이 짓는다. 우리 집안은 한 세대 걸러 외자를 쓰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이름은 두 글자고, 나의 이름은 외자다. 당연히 나의 아들 이름은 두 글자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모른다. 아무튼, 아버지께서는 이황처럼 훌륭한 인물이 되라고 나의 이름을 ‘황’으로 지어주셨다. ‘황’이라는 외자 이름 만 놓고 보면 괜찮지만, 내 성이 ‘허’씨라는 걸 고려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성과 이름을 붙여 부르면 ‘허황’이 되는 것이다.


“허황한 종교를 왜 믿어? 차라리 나를 믿어 봐. 하느님과 부처님보다 더 잘해 줄 자신 있어.”


“증명 해 봐.”


“알았어. 따라와.”


나는 성벽을 뛰어 내려와서 남문으로 나갔다.


“어디 가는 거야?”


“튀김 먹으러.”


“시장 골목 또와집?”


나는 뒤돌아봤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해미에서 튀김 파는 집은 또와집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짙게 드리웠던 그늘이 어느새 사라지고 밝은 표정이었다.


“자, 구름을 아무리 오래 쳐다봐도 꽈배기 하나 주지 않잖아. 그리고, 하느님은 2,000년 넘게, 부처님은 2,500년 가까이 너에게 튀김 하나 주지 않았어. 이것이 바로 나의 위대함이야. 자 꽈배기와 튀김 먹어.”


그 이후로 일요일 오후가 되면 백설공주와 나는 성벽을 한 바퀴 돌고, 읍내시장 골목에 있는 또와집에서 튀김을 먹는 것이 우리의 루틴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날씨는 따듯해졌고, 그녀의 하얀 목선은 더욱 많이 드러났다. 그러다 문득 발견했다. 그녀의 종아리에 있던 파르스름한 정맥이 빗장뼈 바로 위에도 희미하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다 내가 드라큘라로 변하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될 정도로 나는 그네에게 깊이 빠져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행복하고 설렜다. 그리고 그즈음에 내 독특한 취향을 발견했다.


나의 첫사랑은 중학교 1학년 때 과학 선생님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것이 사랑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과학 선생님만 보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교무실에 있는 과학 선생님을 찾아가 구름에 대해 질문하곤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교무실에 들어가려면 문 앞에 서서 ‘몇 학년 몇 반 누구 교무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라고 크게 외치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교무실을 드나들었던 것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마 그 당시 선생님들 모두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과학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내 속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젊었을 때는 그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장점으로 변했다. 상대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과학 선생님은 그런 나를 한 번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구름을 좋아하던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자 구름에 관한 지식이 또래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였다. 과학 선생님은 내가 궁금해하는 구름에 대해 같이 고민하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러다가 과학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발령받으셨다. 선생님은 마지막 날 나에게 책을 선물했다. 영문으로 된 책이었지만, 대부분 구름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어 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에서 발행한 구름관측법에 관한 책이었다.


과학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자, 나는 일주일 동안 학교에 가지 않은 채, 엄마에게 과학 선생님이 새로 부임한 중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 황당한 나의 행동에 아버지는 부러진 곡괭이 자루를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오셨고, 아버지를 엄마가 간신히 말리셨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학교에 갔다. 친구들이 과학 선생님과 ‘꿍짝’ 거렸다고 놀려댔다. 그 ‘꿍짝’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당시는 알지 못했다. 하여튼 놀리거나 말거나. 나는 과학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과학 선생님과 비슷한 여자 친구를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렸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나를 피해 도망 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6개월 동안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그녀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었다. 그녀와 함께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과학 선생님을 존경한 게 아니라 사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영부영하다가 그녀와 헤어지고, 과학 선생님과 비슷한 여자를 또 만났다. 바로 백설공주였다. 그렇다. 과학 선생님과 중학교 3학년 때 여자 친구, 그리고 백설공주, 이 세 사람에게는 묘하게도 모두 통통한 체형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의 세 번째 사랑이었다. 설레지만 어설프지 않게 백설공주와는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백설공주도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호는 백설공주를 계속 돼지라고 놀려댔지만, 내 눈에는 그녀가 보면 볼수록 백설공주와 다름없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 투명한 붉은 입술,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말투까지 서울 말씨였다. 굳이 흠을 잡자면 가끔 엄마처럼 잔소리하는 면이 있다는 정도였다.


“백옥 같은 얼굴이라고? 자세히 봐 봐. 걔 멀쩡한 옷 찢었다가 꿰매느라고 밤새 잠을 못 자 얼굴이 하얗게 뜬 거야. 그리고 그게 어떻게 앵두 입술이냐? 너 앵두와 자두를 헷갈리는 거 아냐? 그리고 뭐 칠흑 같은 검은 머리? 걔 머리카락이 얼마나 뻣뻣한데, 철사 같아. 걔와 일곱 난쟁이를 낳는다고? 걔 허벅지가 네 허리보다 굵어. 걔 다리에 눌리면 너는 마른오징어가 될 거야. 정신 차려.”


“네 동생이라며, 왜 그렇게 못되게 말해?”


“동생이니까 진실을 말해주는 거야.”


대호는 나를 계속 세뇌하려 했지만, 한번 빼앗긴 나의 마음은 그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 일요일만 되면 백설공주와 나는 해미읍성을 한 바퀴 돌고, 읍내시장 골목에서 튀김을 먹었다. 주말이면 유학파 친구들 모두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내가 백설공주를 좋아하는 걸 대호만 알고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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