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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13화

청춘의 마지막 자존심

by 허관

대호는 동업 아저씨부터 베어까지 누구와도 허물없었다. 수업 중 조는 늙은이의 뒤통수를 ‘툭’ 쳐도, 늙은이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놈이면 앞차기, 뒤 돌려차기, 마지막으로 내려찍기로 결딴내고도 남았다.


하지만 대호의 노래는 모두 싫어했다. 대호는 틈만 나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반면, 단추구멍의 노래는 모두 좋아했다.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단추구멍은 스티비 원더였고, 대호는 밤에 소름 돋게 하는 고리니 울음소리였다. 대호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음정과 박자는 물론 가사까지 자기 멋대로 바꿔 불렀다. 노래가 아니라 그저 소음이었다.


반면 단추구멍은 음정, 박자는 물론 감정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선생님들은 수업이 지루하다 싶으면 단추구멍에게 노래를 시켰고, 그때마다 단추구멍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이 멋들어지게 팝송을 불렀었다. 주로 스티비 원더와 스콜피온의 노래였다.


“나비 날아오른다. 조심해.”


학교 울타리 탱자가 노르스름하게 익어갈 무렵, 미어캣이 쿤타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비는 내가 해미고에 입학하기 전부터 해미 읍내에 소문난 인물이었다. 해미 읍내시장 상권 보호 구실로 젊은이들이 조직한 모임의 대장이었다. 인근 불량배들이 해미 시장으로 몰려와 행패를 부리면 그들이 해결했다.


삼십 년 넘게 이어온 전통이라고 했다. 좋게 말해 상권 보호지, 실은 읍내 건달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나비는 배바지보다 한 살 어리다고 들었다. 해미 출신들은 나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유학파들은 본 적이 없었다. 황소 같은 덩치에 힘도 황소 못지않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미어캣이 전한 ‘나비 날아 오른다.’는 나비가 행동을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무슨 행동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미어켓이 쿤타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러니까 나비가 쿤타에게 경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빈지 나방인지에게 전해 줘. 나도 한번 보고 싶어 한다고.”


쿤타는 미어캣을 똑바로 보며 낮게 응수했다. 똥개도 제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 하물며 지역 건달 두목 아닌가. 쿤타가 촌구석 텃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르는 듯해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곱슬과 단추구멍의 얼굴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어렸고, 당사자인 쿤타 얼굴엔 기대와 설렘마저 감돌았다. 대호는 여전히 웃음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건 나 혼자뿐이었다.


미호씨는 학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학생들과 전생에 원수진 것처럼 지휘봉을 마구 휘둘렀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월요일만 되면 교문 앞에서 정차하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수덕사 종점까지 갔다. 대웅전에 가서 포대화상을 만나도 모른 척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포대화상이 아니다. 계속 쫓아다니면서 고추 걱정을 했다.


어느 날, 담임은 왜 월요일만 되면 지각하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했다. 교련 검열 열외 반에 있으면 불편해서 차라리 늦게 들어오는 것이라고. 담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월요일 1교시만 늦지 않게 들어오면 지각 처리를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담임이 큰 배려를 한 것인데,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 저 자식 죽여버리고 해미 뜬다.”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곱슬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미호씨를 보고 격분했다. 그날도 수덕사에 갔다가 1교시 시간에 맞추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들려온 소리였다. 아이들은 교련복을 갈아입느라고 정신없었다.


“왜 그래?”


나는 대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치면서 턱으로 곱슬을 가리켰다. 대호는 ‘이쒸!’ 하면서 내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슬쩍 댔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피하면 몸을 배배 꼬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느라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대호는 나의 머리에 손바닥을 대더니, 희멀건 웃음과 함께 아침 곱슬 사건을 들려주었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교문에서 교련 복장 검열을 했다. 그런데 미호씨가 그동안 문제 삼지 않던 곱슬의 앞머리를 걸고넘어졌다.


“생머리입니다.”


곱슬은 미호씨에게 정중히 말했다.


“앞머리만 곱슬인 사람이 어딨어?”


곱슬은 웃으면서 앞머리만 곱슬인 사람이 많으며, 이는 앞머리를 주변머리보다 길게 기르기 때문에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라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순간 미호씨가 곱슬 앞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곱슬은 미호씨의 손을 뿌리치려 고개를 획 제쳤다. 그때 앞머리가 한 움큼 빠졌다.


손 안 가득한 머리카락을 보고 미호씨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지휘봉으로 곱슬의 등과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미호씨가 때리다 지칠 때까지 곱슬은 꼼짝 안고 맞았다. 미호씨가 매질을 멈추자, 곱슬은 곧바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교련 조회가 끝나고 모자를 쓴 채 교실로 들어온 곱슬이었다.


“얼마나 뽑힌 거야?”


“몰라. 근데 모자까지 쓴 걸 보면 다 뽑힌 거 아냐? 애휴! 불쌍한 놈. 그렇게 애지중지 기르더니만.”


마치 내 마음속 구름처럼, 곱슬도 자신의 앞머리를 소중하게 여겼다. 얼마나 뽑혔을까. 앞머리가 전부 뽑힌 건 아닌지. 혹시 머리가 다시 자라지 않으면 곱슬은 깊은 절망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 죽을지도 몰랐다. 나도 하늘에 구름이 사라진다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곱슬의 머리 상태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머지않아 풀렸다.


“수업 시간에 누가 모자 쓰래? 아무리 해미고라고 하지만 모자는 아니지?”


베어가 출석부로 교탁을 두드리며 곱슬에게 모자를 벗으라고 지시했다.


“다쳤습니다.”


“다치긴, 교련 선생님에게 머리 뜯겨서 그러고 있는 거 다 알아. 모자 벗어.”


베어의 말은 단호했다. 하지만 곱슬은 베어보다 더 단호했다.


“싫습니다.”


“정말?”


“네.”


“싫은 이유를 대봐. 합당하면 그냥 넘어간다.”


“저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마지막 자존심?”


베어는 곱슬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러더니 말없이 수업을 시작했다. 청춘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 선생의 당연한 의무라고 여기는 것처럼. 베어는 지금 생각해도 멋쟁이 선생님이다.


문제는 그다음 수학 시간이었다. 수학 선생님도 곱슬의 모자를 문제 삼았다. 곱슬은 베어에게 했던 것처럼 수학 선생님에게 말했다. 곱슬의 말을 들은 수학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반 애들 앞에서 모자 벗은 모습을 잠깐 보여주고, 너무 흉해 과반수가 모자를 써야 한다고 하면 수학 선생님도 그 의견을 따르고, 아니면 벗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곱슬은 완강했지만 20년 넘게 거친 고등학생들을 다뤄온 베테랑 수학 선생님이었다. 곱슬이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소용없었다. 수학 선생님과 곱슬 간의 팽팽한 긴장감에 평소 잠만 자던 늙은이까지 깨서 이 광경을 봤다. 물론 나도 졸지 않았다. 하지만 대호의 손과 발은 계속 움직였고, 대호의 입술은 금붕어처럼 벙긋거렸다.


곱슬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교실 안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얼마나 머리 상태가 엉망이기에 곱슬이 저렇게 필사적으로 감출까. 모든 시선이 곱슬의 머리로 쏠렸다.


“벗어.”

수학 선생님의 단호한 명령에도 곱슬이 머뭇거리자, 수학 선생님은 잽싸게 모자를 확 벗겼다. 순간 교실 안 모두가 놀랐다.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곱슬의 머리는 평소와 같았다. 수학 선생님은 곧바로 투표 했지만, 하나 마나였다. 모두 ‘모자를 벗어도 된다.’ 쪽에 손을 들었다. 물론, 나는 반대했지만, 아무런 소용 없었다.


“잘 봐. 여기 움푹 들어간 거 안 보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곱슬은 교탁에서 내려와 애들 사이를 돌며 머리를 들이밀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전혀 억울할 상황이 아니었다. 글쎄 몇 가닥은 뽑혔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몇 가닥뿐이었다. 곱슬은 수학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모자를 다시 썼다. 쉬는 시간에 쿤타가 곱슬에게 핀잔주었다.


“얀마. 너 아침에 뭘 잘못 먹었냐. 오늘따라 또라이 짓을 다 하고.”


“정말 미치겠다. 이게 안 보여. 여기 하얗게 속살이 다 보이잖아.”


곱슬은 그 이후로 계속 모자를 쓰고 다녔다. 곱슬이 해미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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