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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11화

웰컴 투 더 호텔 캘리포니아

by 허관

서산터미널에서 20분쯤 걸어갔을까,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눈에 들어왔다. 늦봄의 푸르른 들판과는 사뭇다른 빛깔이었다. 싱그러운 계절에 홀로 익어가는 보리의 모습은 외삼촌의 낡은 양복처럼 어딘가 쓸쓸했다. 외삼촌은 그 늦봄 보리처럼 남들보다 일찍 늙어갔다.


보리밭을 지나 작은 마을 어귀에 잠시 멈췄다. 뒤로는 낮은 산자락이 펼쳐져 있고, 비탈면을 따라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었다. 모두 차고와 정원을 갖춘 이층집들이었다.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 단추구멍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바윗돌 계단이 나타났다.


마당의 늙은 난쟁이 소나무는 굵은 철근을 마구 구부려 놓은 듯 가지가 꾸불꾸불했다. 담을 따라 듬성듬성 서 있는 향나무는 정원사의 손길로 푸른 뭉게구름처럼 동글게 잘 다듬어져 있었고, 계단 양쪽에는 키가 고만고만한 사철나무가 빽빽했다. 돌로 놓은 징검다리 같은 숲길을 지나자 그제야 마을 어귀에서 본 이층집이 나타났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윤이 나는 원목 마루였고, 거실 중앙 소파 앞까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왼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책들이 빽빽했고, 그 앞 안락의자에는 주인이 방금까지 읽었을 법한 책이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대문을 열고 한 발짝만 디디면 마루고, 마루에서 문만 열면 곧장 내 방으로 이어지는 우리 집과는 전혀 다른 구조였다. 단추구멍의 늘어진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집이었다.


“누구?”


“친구야.”


“키도 크고 멋지네. 어여 들어오렴.”


나는 그때 깡마른 몸에 전봇대처럼 키만 커서 맞는 옷이 없었다. 옷을 몸에 맞추면 팔이 너무 짧았고, 팔 길이에 옷을 맞추면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옷이 너무 커서 어깨선이 팔꿈치 가까이 내려왔다. 정말 어정쩡한 몸매였다. 그런 나를 보고 멋있다고 하는 할머니는 분명히 사람의 속마음을 볼 줄 아는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다.


가지색 블라우스, 하얗게 센 단발머리, 눈가의 잔주름이 고고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항상 쪽진 머리나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의 중년 여자만 보다가 백발의 단발머리 할머니를 보니 마치 만화영화 속 미래 도시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줄곧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던 할아버지도 중후하니 멋있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도 새하얀 와이셔츠에 주름이 선명한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길이 부드러웠다.


천장에 유리구슬이 촘촘히 박힌 샹들리에가 창으로 스며든 노을빛에 물들었다. 서산에 이런 집이 있다니, 그리고 단추구멍이 이런 대궐 같은 집에 살다니, 단추구멍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단추구멍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온전히 단추구멍 혼자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정면 벽면의 3분의 2를 차지한 거대한 오디오 시스템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엄마 화장대를 세워 놓은 것보다 더 큰 스피커가 양쪽에 있었고, 그 사이에는 LP 턴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왼쪽 벽면에는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이로 LP판들이 가득했다.


“야 한번 틀어 봐. 빨리.”


나는 방 양쪽에 우뚝 서 있는 스피커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지 몹시 궁금했다.


“뭘 듣고 싶은데?”


“아무거나. 빨리.”


단추구멍은 신중하게 음반을 골랐다. 잠시 후 검은 LP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렸다.


“이쪽으로 와.”


단추구멍이 내 손을 잡아끌어 출입문 쪽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곧바로 묵직한 저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자세히 들어보니 왼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와 오른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달랐다. 여러 악기 소리의 구분이 또렷했다. 그런데 한참 동안 들어도 노래는 나오지 않고 계속 악기 소리만 들렸다. 점점 졸음이 밀려왔다.


“말러 교향곡 5번인데, 별로야?”


“말러? 그게 뭔데? 악기 이름이야?”


단추구멍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듣고 싶은 거 있어?"


“이글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단추구멍이 곧바로 일어나 LP판을 교체했다. 전주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였다. 우리 집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저 소음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기타 줄 위를 빠르게 오가는 손가락의 마찰음까지 선명했다. 기타 독주가 한참 이어지다가 드럼이 쿵! 쿵! 두 번 울린 뒤 이글스 보컬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타와 드럼, 그리고 보컬의 음성이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특히 드럼 소리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드럼이 울릴 때마다 내 가슴을 쿵쿵 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왼쪽과 오른쪽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선율도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눈을 감고 음악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마치 바로 앞에서 드럼을 치는 것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드럼 소리가 빠르게 이동했다. 나는 두 팔로 내 가슴을 감쌌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너 팝송도 싫어하는구나. 알았어. 가요 틀어줄게. 김수철? 이선희?”


“아니 이글스 너무 좋아.”


단추구멍이 내가 눈을 감고 있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단추구멍의 팔을 잡았다. 눈을 뜨면 캘리포니아 사막을 질주하던 내가 현실로 끌려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보컬의 노래가 끝나고 기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호텔 캘리포니아’의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우리 집 카세트테이프로 들을 때는 이 부분에서 볼륨을 약간 높였다. 볼륨을 최대로 올리면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고, 볼륨을 낮추면 기타와 드럼 소리가 뒤죽박죽되어 이상한 소음이 나곤 했기 때문에 적절한 볼륨 조절이 중요했다.


날이 흐리면 평소보다 조금 낮췄고, 날이 맑으면 높였다. 엄마가 화났으면 조금 낮췄고, 엄마가 기분 좋으면 높였다. 밤에는 낮췄고, 휴일 낮에 아무도 없을 때는 스피커가 찢어지든 말든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그때마다 스피커에서는 목 쉰 괴물의 울부짓음 같은 소리가 났다. 단추구멍 방에 있는 거대한 스피커는 절대 찢어지는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기대되었다.


드디어, 드럼 소리가 낮게 깔리면서 본격적인 기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제야 나는 연주하는 기타가 두 대가 아니라 네 대라는 사실을 알았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음에도 모르고 있었다.


점점 기타 합주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기타 줄을 짧게 잡아 빠르게 튕겼다. 짧으면 짧을수록 소리는 더 높아지고, 불안해졌다. 그 불안함을 또 다른 기타가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낮게 깔려 있던 드럼 소리가 커지면서 기타 합주 속으로 파고들었다.


드럼과 기타 연주가 같은 속도로 절정을 향해 치달아서 무엇이 드럼이고 무엇이 기타이고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이글스와 같은 방에 있었다. 이글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드럼 연주자의 땀이 내 손등으로 튀었고, 기타 연주자들은 긴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내 왼쪽과 오른쪽 귀에 대고 기타 줄을 짧게 튕겼다. 기타 줄은 더 짧아지고 리듬은 더 빨라졌다. 이미 드럼 스틱을 쥔 손과 기타 피크를 쥔 손가락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나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드디어 머릿속에서 섞인 드럼과 기타가 펑 터졌다. 자위행위 시 사정의 순간처럼 짜릿한 희열이 온몸을 휘감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듯이, 기타 소리는 방에서 천천히 나가 현관문을 지나 대문을 열고 아득히 멀어졌고, 나 홀로 뭉게구름 위에 떠 있는 듯했다.


연주가 끝났음에도 내 머릿속에는 한동안 기타와 드럼 소리가 맴돌았다. 나는 그 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손뼉을 쳤다. 이럴 때 손뼉 안 치면 난 평생 손뼉 칠 기회가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최대한 큰소리로 외쳤다.


“존나게 멋지다. 이글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음악은 원시인의 흥얼거림에 불과했다.


“야. 네가 욕하는 거 첨 들어봐.”


맞다.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욕을 하지 않았다. 내가 모범생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욕을 하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야 이거 얼마짜리냐? 내일부터 공사판에 나갈 거야.”


“나도 잘 몰라. 근데 스피커와 연결한 케이블 하나가 백만 원이래. 그러니까 케이블 가격만 해도 2백만 원이야. 공사판 일당으로 살려면 오래 다녀야 할걸?”


“그럼 우리 은행 털까?”


“왜 우리야? 너 혼자 해.”


“야 친구잖아.”


“은행 털지 말고, 이거 들으면 되잖아. 네가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서 들어도 돼.”


“정말?”


단추구멍이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그 이후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단추구멍 집에 가서, 음악을 들었다.


“근데 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애가 왜 이래. 이글스 음악을 듣더니 완전히 미쳤구나. 조금 전에 봤잖아?”


“할아버지, 할머니 아냐?”


“너 죽을래.”


단추구멍이 나의 몸을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맞다. 그 당시에도 단추구멍은 침대에서 잤던 거였다. 아무튼, 단추구멍은 3남 2녀 중 막내였다. 단추구멍은 부모님의 계획에 없던, 이른바 실수로 태어난 아이였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 시절에는 그런 ‘실수’로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단추구멍은 바로 위 형과 자그마치 14년 차이가 났다. 단추구멍의 엄마는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고, 아버지는 사회운동가였다.


“사회운동가가 뭐야?”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게 돕는 일이라는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야 그거 돈 많이 버나 보다. 나도 그거 하고 싶다.”


“돈을 벌어? 꼴아박은 게 얼만데.”


“그럼, 이 집은 뭐야? 저 비싼 전축은?”


“할아버지가 부자셨어. 아버지가 외동아들이니 그걸 다 물려받았지. 아버지는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쪽에 훨씬 소질 있어.”


그때 누군가가 밥 먹으라고 외쳤다. 단추구멍 엄마 목소리였다.


“눈, 코, 입이 뚜렷하고 키도 커서 다 크면 멋지겠는걸. 애휴~ 쟤는 누굴 닮아서 저리 험악하게 생겼는지.”


저녁 식탁 자리에서 단추구멍 엄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한탄 조로 말했다. 그러자 단추구멍은 곧바로 대꾸했다.


“누군 누굴 닮아, 엄마 닮았지.”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갈비와 잡채를 입안으로 마구 집어넣었다. 흔히 먹을 수 있는 갈비와 잡채가 아니었다.

“애는 먹는 게 다 키로 가나 봐. 참 잘 먹네. 더 줄까?”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이거? 아니면 이거?”


그녀는 갈비와 잡채를 차례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두 번 물음에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빈 접시에 갈비와 잡채를 가득 채웠다. 나는 허겁지겁 먹다가 단추구멍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나의 눈과 마주치자 인자한 미소로 윙크했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후로 줄기차게 단추구멍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음악을 들었다.


그날도 배불리 먹고 2층으로 올라가서 호텔 캘리포니아를 열두 번 더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은 음악이었다.


“야 귀에서 피 나오겠다. 그만 듣자. 내일 들어도 되잖아.”


“언제든지 들어도 된다고 할 땐 언제고. 치사한 자식.”


“알았어.”


단추구멍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이마이로 무언가를 들었다. 나는 그때 마이마이를 처음 봤다. 저렇게 작은 기계에서 소리가 난다는 게 신기했다. 이어폰을 빼앗아 내 귀에 꽂았다. 음악이 아니라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추구멍 엄마 목소리였다.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다. 단추구멍은 잽싸게 이어폰을 빼앗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거야?”


나는 이미 중학교 3학년 때 형의 국어 교과서를 다 읽었다. 그때 ‘낙엽을 태우면서’ 수필이 너무 좋아 외우기까지 했었다.


“너 이 수필 알아?”


“그럼 알고말고. 외울 수도 있어.”


단추구멍은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형도 그랬고, 누나도 그랬고, 옆집 친구도 그렇게 쳐다봐서 익숙했다. 개만도 못한 머리로 어떻게 저걸 다 외웠을까? 하는 표정. 하지만 외삼촌만은 기뻐하셨다. 갑자기 외삼촌이 보고 싶어졌다.


“외워 봐. 너 거짓말이지. 니가 설마.”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뜰 안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잠깐만, 녹음하자.”


단추구멍이 한참 듣더니 벌떡 일어났다.


“뭐? 녹음? 왜?”


“엄마 낭독은 쉬는 부분도 제멋대로고, 마침표에서도 그냥 이어 읽는 등 뒤죽박죽이라 듣기가 불편해서 그래.”


“야. 너 정말 게으르다. 책을 보면 되지. 그리고 이런 명작은 활자로 읽어야 하는 거야.”


“난 못 읽어.”


“설마? 너 한글 모르니?”


“아니. 알아.”


“그럼?”


“난독증이야.”


“뭐라고? 독 중독이라고? 뭔 독인데?”


“아니 그런 게 있어. 설명하자면 복잡해.”


하지만 단추구멍의 말처럼 난독증의 증상은 복잡하지 않았다. 단어를 읽어도 머릿속에서 이어 붙이지 못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증세였다. 단추구멍에게 처음으로 난독증이 찾아온 건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중간고사 시험 준비하는데 어느 순간 교과서를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단어는 아는데 말이다.


단추구멍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스스로 공부를 즐겼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공부였다. 자연스럽게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은 반대했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워작 똑똑하고 바른 아이였기에 ‘큰물에서 놀아야 큰 인물이 된다’며 작은고모가 반강제로 서울로 데려갔다. 엄마와 아버지가 보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참았다. 그러다가 난독증으로 인해 그 꿈에서 멀어졌다. 결국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다시 서산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단추구멍은 누군가가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경찰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훌륭한 경찰이 되어 불의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의 부모님도 그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난독증은 계속되었고, 하는 수 없이 해미고에 입학했다. 단추구멍도 나처럼 책을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녹음을 부탁했던 거였다. 하지만 엄마가 장편을 읽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짧은 글만 녹음하여 듣는다고 했다.


“알았어. 내가 멋지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녹음해 줄게. 조용히 해.”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좋아하는 ‘낙엽을 태우면서’였다. 이효석 작가가 작품을 쓸 때 느꼈을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낭독할 자신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낙엽이 쌓인 마당과 그것을 쓸고 있는 중년의 뒷모습을 떠 올렸다. 단추구멍이 낙엽 타는 냄새를 맡고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낄 수 있게 최대한 감성을 담아 낭독했다.


“야 멋지다. 이렇게 똑똑한 놈이 왜 해미고에 왔어?”


“내가 똑똑하다고? 개가 웃겠다. 너 내 말 듣고 웃지 마.....아니다. 아냐.”


나는 얼른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낙엽을 태우면서’를 낭독하다가 나도 모르게 감성에 젖어 하마터면 내 깊은 상처를 드러낼 뻔했다.


“야 말해 봐 뭔데? 정말 그러기야. 난 가장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했는데, 친구끼리. 정말 너무한다. 너 말 안 하면 잠 못 잘 줄 알아.”


단추구멍은 집요했다. 그래서 나는 단추구멍에게 털어놓았다. 나의 머릿속에 있는 폭력차단회로의 비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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