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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12화

내 머릿속 폭력차단회로

by 허관

내 머릿속에는 폭력차단회로가 있다. 누군가가 내 머리에 가벼운 충격만 가해도 뇌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지듯 정신을 잃곤 한다. 이 기이한 현상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외할머니댁에 놀러 갔다가 겪었던 끔찍한 사건 이후에 생겨났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그해 봄에도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모내기철과 추수철이면 외할머니는 밥이라도 해준다고 하면서 우리 집에 오시곤 했다. 그해도 모내기 도우러 오셔서 부엌에서 열심히 반찬을 만드시다가, 외삼촌이 이틀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로 가셔야겠다고 서두르셨다.


엄마는 다 큰 자식인데 무슨 걱정이냐며 외할머니를 만류했지만, 외할머니의 고집은 완강했다. 누나와 형들은 모두 농사일을 도와야 했기에, 결국 내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외할머니를 모신 건지 아니면 외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갔는지 애매했지만, 엄마는 외할머니 혼자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안심하는 눈치였다. 외할머니는 글을 읽지 못해 터미널에서 엉뚱한 차에 오르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서산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찾아드리는 게 내 임무였다.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지금은 서산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면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용산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용산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외할머니댁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할머니 댁에는 외삼촌은 보이지 않고 큰이모가 와 계셨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큰이모와 외할머니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TV를 봤다. 한참 후 방에서 큰이모와 외할머니가 나왔다. 외할머니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자 나도 덩달아 가슴이 무거워졌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외할머니가 어딘가로 서둘러 나가셨다가 어둑해져서야 시름 가득한 얼굴로 돌아오셨다. 다음 날도 큰이모와 함께 외할머니는 아침 일찍 어딘가로 나가셨다. 나는 집 안에만 있기가 너무 답답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늘 사람들이 오가던 골목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멀리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군인 세 명이 한 남자를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무자비하게 발로 짓밟고 있었다. 나는 전봇대 뒤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봤다. 쓰러진 남자가 정신을 잃자 그제야 군인들은 발길질을 멈추더니 남자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나는 곧장 뒤돌아서 외할머니댁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5층짜리 건물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나는 당황한 나머지 외할머니댁과 정반대 방향으로 뛰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5층 건물을 끼고 돌아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자욱한 연기로 뒤덮인 넓은 길이 나타났다. 눈이 따가워 무심코 눈을 비볐다. 마치 밤송이로 눈을 문지르는 것처럼 따갑고 콧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때 나는 언뜻 외삼촌의 모습을 보았다. 외삼촌은 나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빨리 도망가!”


바로 그 순간, 군인들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외삼촌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결국 외삼촌은 맥없이 쓰러졌고, 군인들은 쓰러진 외삼촌을 군홧발로 마구 짓밟았다. 순식간에 외삼촌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때 골목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군인들은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 사람들은 쓰러진 외삼촌을 데리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온몸이 굳어 꼼짝할 수 없었다. 외삼촌을 데리고 그 무리가 사라지자 다시 군인들이 몰려왔다. 조금 전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군인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군인이 나를 향해 뛰어오며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두려움에 머리를 감싼 채 두 눈을 감고 시멘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디선가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군홧발 소리와 비명이 뒤섞이며 공포가 극에 달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를 건드렸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지금도 그때 누가 내 머리를 때렸는지, 그냥 가볍게 스친 건지, 아니면 나의 망상이 두려움을 만들어 내 내가 기절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깨어나 보니 외할머니 댁 방에 누워있었고, 외삼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폭력차단회로가 작동한 것이었다.


외삼촌은 그 사건이 있고 3일 후, 사복경찰에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한 달 만에 풀려났다. 영혼의 절반을 알 수 없는 그곳에 둔 채. 그 후로 외삼촌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냈고, 나는 누군가가 위협하며 내 머리를 스치기만 해도 정신을 잃었다.


나는 이 사실을 숨기려고 친구가 싸움을 걸어와도 무조건 피했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때는 먼저 주먹을 날렸다. 소나기처럼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어 상대가 감히 맞설 엄두도 못 내게 만들어 싸움을 일방적으로 끝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외삼촌으로부터 배운 싸움의 기술이었다. 중학생이 되니 싸울 일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3년 동안 내 ‘폭력차단회로’가 작동한 적은 한 번뿐이었다.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선생님이 내 뺨을 때렸을 때였다. 그 후 외삼촌은 학기 초에 항상 학교에 와서 담임 선생님과 상담했고, 더는 내 뺨을 때리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래서 한문 선생님의 손목을 잡은 거구나.”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추구멍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제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 봬도 꿈이 정의의 사도잖아. 아직은 어설프지만, 너 한 명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어.”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 그런데 나는 싸우지 않을 거야. 폭력을 싫어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잖아. 아주 정상인 거지.”


“니 말이 맞아. 하지만, 문제는 지금 네가 해미고에 다닌다는 거야.”


단추구멍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나는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를 믿어.”


비록 빈말일지라도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럼 내가 멋진 음성으로 녹음해 줄게. 너 읽고 싶은 책 있어? ”


“정말?”


단추구멍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물론, 커졌다고 하여 단추구멍 눈동자의 1/3 이상 보이게 커진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 약속.”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단추구멍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나의 손가락에 걸자마자 말했다.


“삼국지.”


“어린이용 삼국지?”


“아니, 박종화 삼국지.”


“너 그게 몇 권인지 아니?”


“10권.”


“미친 자식.”


“농담이야. 시간 되면 노인과 바다 녹음해 줘.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어.”


“읽어봤자 뻔한 내용이야. 말 그대로지. 노인이 어렵게 큰 물고기를 잡는데, 육지로 돌아오다가 그 물고기를 상어에게 다 빼앗기는 이야기.”


“나도 어린이용 읽어봐서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 어렸을 때 읽었는데도 아직도 생생해. 완역본을 읽으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알았어. 근데 녹음기와 테이프는?”


“이거로.”


단추구멍이 나에게 마이마이를 주었다.


단추구멍은 경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유도도 배우고, 태권도도 배웠다. 심지어 쿤타에게 실전 대처법까지 익혔다. 하지만 경찰이 되려면 시험을 봐야 했다. 시험을 보려면 공부해야 했고, 그 시험 범위가 만만치 않았다. 서산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쫓겨난 그의 실력으로 가능할까. 괜히 헛된 꿈을 부추겨 녀석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멸이 반복된다면, 인생은 언젠가 패배하고 만다. 그 당시 내가 단추구멍의 꿈을 걱정한 이유였다.


여름방학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일주일에 두 번 단추구멍 집에 들러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는 것 외에는 줄곧 집에서 운동만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백설공주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나의 영문 이름의 첫 글자가 새겨진 하얀 손목 밴드였다. 백설공주가 직접 바늘로 새긴 글씨였다.


“고마워. 그런데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네. 미안.”


정말로 고마웠고, 정말로 미안했다.


“너 손목 보니 너무 약해 보여서 내가 한번 만들어 봤어. 너 왼손잡이지?”


백설공주는 내가 왼손잡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유학파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가 나에게 세심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내가 약해 보인다는 그녀의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근육을 키우고자 근력 운동을 열심히 했다.


‘와, 람보다!’ 하며 개학 첫날 반 친구들 모두 내 달라진 모습을 보고 놀라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백설공주가 내 우람한 팔뚝을 보고 더는 엄마 같은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름방학 내내 아무리 운동을 해도 생각처럼 근육이 붙지 않고, 키만 더 자랐다. 운동한다고 엄청나게 먹어 댄 것이 모두 키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어깨가 넓어지고 알통도 약간 커지긴 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지만.


“니가 콩나물이냐? 이러다가 하늘도 뚫겠다.”


배바지의 말에 곱슬과 쿤타가 웃었다. 곱슬과 쿤타의 키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곱슬의 등은 더 구부러져 키가 줄었다. 부쩍 자란 내 키가 민망했다. 이젠 곱슬과 쿤타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더 숙여야 했다. 나는 반소매를 어깨 위로 걷어 올렸다. 자세히 보면 보이는 알통을 누군가 봐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야 팔뚝 좀 봐!!”


대호가 호들갑을 떨며 나에게 다가왔다. 여름방학 내내 거울을 보면서 긴가민가했다. 어떤 때는 근육 같다가도 어떤 때는 뼈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보며 근육의 상태를 점검했던 나는 천천히 불어나는 근육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나를 보는 대호의 눈에는 내 커진 근육이 확 띄었던 게 분명했다. 대호의 호들갑이 반가웠다. 나는 팔뚝에 힘을 더 주었다. 여름방학 동안 땡볕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한 보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이래서 노력하는구나. 노력의 결실이 이렇게 달콤한 줄은 미처 몰랐다. 알통이 더 튀어나오게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새까맣게 탄 게 마치 불에 그슬린 개뼈다귀 같아. 너 방학 동안 내내 굶었니? 뼈에 듬성듬성 붙어 있던 살마저 녹아 사라졌어. 대체 방학 동안에 뭔 짓거리 한 거야?”


나는 대호의 말에 내 팔뚝을 보았다. 대호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개가 뜯어먹고 버린 뼈다귀처럼 앙상했다. 새하얗고 매끈하던 팔뚝이 검게 그을린 데다 잔근육들이 뼈에 달라붙어 더 몰골이 더 흉측했다.


“개 근처에도 가지 마라. 잘못하면 물어 뜯긴다.”


대호가 내 팔뚝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정말 내 팔뚝이 개뼈다귀 같냐?”


“그래. 너무 부정하려고만 하지 마. 네 현실을 받아들여. 너도 거울을 봐서 알 거야. 네 모습을 말이야.”


단추구멍이 나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진중하게 타일렀다.


“야 근데 넌 왜 나를 말리지 않았어?”


“뭘?”


단추구멍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맞다. 단추구멍은 내가 운동하는 걸 모르고 있었다.

“너 정말 전축 사려고 방학 동안에 공사판 다녔냐?”


“아냐!”


나는 차갑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 인생무상이여. 갑자기 수덕사 포대화상이 그리워졌다.


“백설돼지가 왜 안 오냐고 걱정하더라. 가자.”


종례를 마치고 학교 뒷문으로 나오자마자 대호는 나의 목을 감더니, 빵집으로 끌고 갔다. 내가 콩나물처럼 자랐어도 하늘 아래 뫼처럼 대호에게는 어림없었다. 방학 동안 대호는 힘이 더 세졌다.


“싫어, 안 만날 거야.”


대호의 손아귀를 내 힘으로는 절대 풀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목을 감고 있는 대호의 팔을 이빨로 물어버렸다. 비명과 함께 팔이 풀렸다. 나는 터미널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터미널에는 수업을 마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로 바글거렸다. 곧바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팬티만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단추구멍의 말대로 참혹한 진실이 거울 속에서 나를 노려봤다. 나는 다짐했다. 백설공주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만 읍내 생선 장수 아주머니만 봐도 백설공주 같았다. 별을 봐도 백설공주의 하얀 치아가 보였고, 뭉게구름을 봐도 백설공주의 새하얀 볼이 보였다. 굵고 저음인 베어의 목소리마저 백설공주의 아름다운 목소리처럼 들릴 때,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혼자 몰래 빵집에 갔다가, 백설공주로부터 의외의 말을 듣고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야 너 멋있어졌다. 얼굴도 까무잡잡하게 잘 그을려서 훨씬 보기 좋아. 남자답고.”


백설공주의 ‘남자답고’라는 말에 나는 해미읍성이 무너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신이 난 나는 맘모스 빵을 먹으며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했다.


“난 쓸쓸하고 허탈하던데.”


백설공주는 보컬의 쓸쓸한 목소리와 기타 합주 후 느끼는 허탈한 감정 때문에 그 노래가 싫다고 했다. 나는 보컬의 쓸쓸한 목소리와 기타 합주 후 느끼는 허탈감 때문에 그 노래를 좋아했다. 하여튼 백설공주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며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사적 감정을 걷어낸 내 본래 모습이 개뼈다귀이듯이, 어쩌면 백설공주의 본래 모습도 대호 말대로 돼지일지 모른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그녀는 또와집으로 이어진 시장 골목 동태 장수 아주머니와 덩치가 비슷했다. 동태 장수 아주머니는 뚱뚱했다. 어쩌면 내겐 다행인지도 몰랐다. 만약 모든 남자의 눈에 백설공주가 진짜 백설공주처럼 보였다면, 나는 백설공주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백설공주의 눈에도 내가 멋지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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