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면 으레 곱슬의 자취방에 모여 점심을 함께했다. 여전히 곱슬은 어묵으로만 반찬을 만들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집에서 김치를 가져갔다. 엄마는 내가 자취하는 친구에게 가끔 밥을 얻어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반찬 그릇에 김치를 정갈하게 담아 주곤 했다. 단추구멍은 장아찌를 가져왔다. 평소 낮에는 늘 조용하던 여인숙이 그날따라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뭐냐?”
“영화 촬영하는 사람들이래.”
낮에는 텅 비어 있던 여인숙 방마다 신발이 대여섯 켤레씩 놓여 있었다. 어림잡아 삼십 명은 되어 보였다. 쿤타가 여인숙 마당에 놓인 생경한 촬영 장비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곱슬은 석유풍로에 밥솥을 올리고 불을 붙였다.
“이런 시골에서 영화 촬영을?”
“해미읍성 때문에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촬영도 자주 해.”
밥을 먹고 모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소화를 시켰다. 방 한가운데에는 빈 그릇만 남았다. 이 가운데 내가 해미읍성에 대해 가장 잘 알았다. 나는 길게 트림을 한 뒤 친구들에게 해미읍성에 대해 들려주었다.
해미읍성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읍성이다.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 성종 때 쌓은 성으로, 지은 지 500년이나 되었다. 성벽 높이는 5m, 둘레는 2km가량 된다. 조선 시대 해미는 서산, 당진, 태안, 홍성, 예산 등 충청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지였다. 해미읍성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성으로, 이순신 장군이 1년 가까이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태안반도는 선진 문물이 빨리 전파되어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이 많았고, 그만큼 박해도 심했다. 해미읍성에서만 약 1천 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그러니까. 옛날 배경 영화나 연속극 촬영하러 많이 온다는 거지?”
쿤타가 좀이 쑤시는 듯 내 말을 끊었다. 그때 누군가가 자취방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기생오라비처럼 코밑에만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혹시 엑스트라 출연하실 수 있어요? 급하게 필요해서요. 만 원 드릴게.”
만 원이라는 말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기생오라비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기생오라비가 나눠준 포졸복으로 갈아입었다. 가마를 따라 남문에서부터 동헌 건물까지 걸어가는 장면을 촬영했다. 포졸로 변장한 우리는 가마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식은 죽 먹기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컷!”
중간쯤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단추구멍의 손목에 있던 시계가 손등으로 흘러내려 카메라에 잡혔기 때문이다.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걸었다. 누군가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키가 커서 가뜩이나 짧았던 대호의 포졸복 바지가 말려 올라가 오색 양말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00여 미터를 열댓 번은 오간 후에야 걸어가는 장면 촬영이 끝났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음 촬영 장소는 팔각정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었다. 그림자가 길어지더니 어둠이 발밑까지 차올랐다. 서쪽 뭉게구름은 짙은 먹물을 머금은 듯 검푸르게 가라앉았고, 상층운인 낚시 구름만 하얗게 빛났다. 아직 상층에는 해가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파른 계단 아래에 서자 더욱 어두웠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가 여자가 뛰어가고, 남자가 여자를 쫓아 계단을 오르면 너희들도 따라 올라가면 되는 거야. 알았지? 그리고 이번 촬영은 한 번에 성공해야 해. 두 번 기회는 없어.”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직전에 찍어야 했기에 촬영 보조는 실수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 채 기다렸다. 드디어 동헌에서 뛰어나온 여자가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곧이어 남자가 여자를 쫓아갔다. 하지만 여자의 충격적인 모습에 그 누구도 남자의 뒤를 쫓아가지 못했다. 기저귀 같은 천 조각 하나로 겨우 가랑이만 살짝 가린 채, 여자는 완전히 나체였던 것이다. 커다란 유방이 출렁였고, 풍만한 엉덩이가 실룩거리며 우리 앞을 지나갔다.
“컷!”
“야 니들 뭐하는 거야? 정신 안 차릴래? 그따위로 하면 돈 없어. 알았어?”
누군가가 나타나 알몸 여자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동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촬영이 재개되었다. 다시 여자가 나체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남자가 뛰어가자마자 우리도 우르르 남자의 뒤를 따라 뛰었다.
“컷!”
중간쯤 올라가다가 멈추었다. 뒤를 돌아봤다. 대호가 희멀건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촬영 보조가 대호에게 다가가더니 뒤통수를 때렸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대호의 웃음기가 가셨다.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그래도 촬영은 마쳤다.
코털 기생오라비는 중년 남자에게 된통 혼이 났다. 어디서 저런 머저리들을 데리고 와서 촬영을 망쳤다느니, 다시 촬영하게 생겼는데 책임질 거냐며 중년 남자가 기생오라비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나는 돈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혼쭐난 기생오라비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환하게 웃으며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돈봉투를 건네주었다. 그 기생오라비는 훗날 영화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유명 영화감독이 되었다. 물론, 이제는 콧수염도 기르지 않는다.
“그렇게 좋았어? 우쭈쭈.”
쿤타가 대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는 5만 원으로 자장면 곱빼기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고, 남은 돈으로 맥주와 안주를 사서 해미 천변에 둘러앉았다. 둥근 달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배도 부르고 술기운도 올라 나른해진 우리는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문득, 백설공주가 떠올랐다.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서산에서 돌아왔을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달밤이었다.
“야. 너희들이 유학파라고?”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에 동시에 상체를 일으켰다. 구부정한 자세로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자였다. 단추구멍이 벌떡 일어났다.
“앉아 있어. 누가 너희들 여기 있다고 하길래 그냥 궁금해서 와 봤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독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덩치는 대호보다 훨씬 컸으며 팔이 길었고, 머리는 짧게 깎았다. 눈은 작아서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고, 입술은 두툼했다. 구부정한 어깨가 쓸쓸해 보였다. 달빛 때문이었을까.
“니가 나비냐?”
두 손바닥을 땅에 짚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앉아있던 쿤타가 물었다.
“하하하. 이런 나비 말하는 거야?”
남자는 호탕하게 웃더니 마치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양팔을 벌려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내가 나비야. 나비, 날아간다.~~~~”
갑자기 나비가 소리 질렀다. 문득 미어캣이 한 말이 생각났다.
‘나비 날아오른대, 조심해.’
정말 나비가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미어캣이 그러더라. 나 보고 싶어 한다고. 직접 말하지. 그랬으면 더 반가웠을 텐데?”
어느새 우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비는 하나하나 뜯어보며 별명을 확인하듯 불렀다. 나비는 우리를 모두 알고 있었다.
“너구나? 내가 왜 보고 싶었어?”
나비가 쿤타 바로 앞에서 멈췄다.
“니가 우리를 궁금해한다고 해서.”
쿤타의 답변은 침착했다. 대호는 저 멀리 떨어져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나도 대호처럼 소변이 마려웠지만 참았다. 나비 혼자 왔을 리 없었다. 그는 해미에서 가장 강한 건달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천 상류 쪽 갈대숲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했다. 대여섯 명은 충분히 숨을 만한 갈대숲이었다. 그리고 언덕 위 길을 따라 벚나무가 무성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맥주 마시고 있었구나?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
나비가 철퍼덕 주저앉았다. 나비 옆에 쿤타와 단추구멍도 나란히 양반다리로 앉았다. 단추구멍이 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얼떨결에 그 옆에 앉았다.
“우리 여기 있는 거 누가 알려준 거냐?”
“야, 여긴 해미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동네야. 너희들 영화 촬영한 것도 이미 소문 다 났어.”
혹시 출연료를 갈취하러 온 건가. 제발 그렇다면 쿤타가 순순히 돈을 주고 나비를 돌려보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야, 하여튼 반갑다. 잘 지내보자.”
단추구멍이 자신의 잔을 비우더니 나비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나비는 잔을 비우더니 단추구멍에게 주었다.
“씨름할까?”
한참을 잔 돌리기를 하더니, 나비가 단추구멍에게 제안했다. 단추구멍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듯 몸이 약간 비틀거렸다.
“야 너 술 취했어. 나중에 하자.”
“괜찮아. 자 이리 와.”
둘이 허리춤을 잡고 씨름 자세를 취했다. 단추구멍이 왼쪽으로 몸을 돌면서 힘을 썼지만, 나비는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미동도 없었다. 다음 동작으로 단추구멍이 나비의 상체를 끌어당겨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 했다. 나비가 앞으로 끌려가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원위치로 돌아갔다. 단추구멍은 양쪽으로 빠르게 몸을 흔들더니 손으로 나비의 오른쪽 무릎 안쪽을 잡아당겼다. 드디어 나비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와, 기술 좋은데, 내가 졌다 졌어.”
나비가 바지에 묻은 흙을 툴툴 털면서 일어났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단추구멍의 표정이 돌연 굳어졌다.
“그래, 재밌게 놀아. 늦었지만, 해미에 온 걸 환영한다.”
나비는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에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거대한 맹수 같은 위압감이 풍겼다.
“너 왜 그래?”
곱슬이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던 단추구멍에게 물었다.
“몸이 돌덩이 같았어. 저런 인간은 첨 봐.”
“돌도 연장으로 쪼개면 박살 나지. 안 그러냐? 병든닭.”
쿤타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해미의 전설 나비와의 첫 만남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달 밝은 밤, 나비는 홀연히 나타났다 그렇게 사라졌다.
열흘 가까이 학교에 나오지 않던 동업아저씨가 교실에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넓은 들판 가득 넘실대던 황금물결은 간데없고, 밑동만 남은 검은 논바닥이 황량하게 펼쳐져 있었다. 추수를 마치고 돌아온 동업 아저씨였다. 가을볕에 검게 그을린 동업 아저씨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모두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 당시 한티산적 늙은이는 한 달째 무단결석을 했다. 서울로 돈 벌러 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여자와 눈이 맞아 새살림 차렸다는 말도 떠돌았다. 하여튼 늙은이는 1학년 마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퇴학 처리되었다. 그 이후로 몰린눈과 왕눈이는 교실에서 없는 듯 있는 듯 조용히 지냈다.
“니가 애들 때렸다면서?”
“그래서. 네 자식이라도 되냐?”
드디어 곪을 대로 곪았던 고름이 터지고 말았다. 단추구멍은 그동안 익힌 싸움 기술 시험 상대로 삽자루파 장비를 선택했다. 덩치도 좋고 싸움도 어느 정도 할 것 같아 제격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단추구멍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나쁜 놈이고, 앞으로 절대 집에 놀러 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단추구멍은 내 완강한 태도에 자신의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다가 서산에서 다니는 애들이 삽자루파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리 친하지 않다고 해도 중학교 동창생이며, 일부는 같은 동네 친구이기도 했다. 그 지경까지 이르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따라와!”
단추구멍이 앞장섰다. 장비도 잠바를 벗어 의자에 던져 놓고 단추구멍의 뒤를 따라갔다. 학생들이 그 뒤를 우르르 몰려갔다. 학교 탱자나무 울타리 개구멍으로 나갔다. 벚나무 숲에서 단추구멍이 멈췄다. 장비도 제자리에 멈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장비의 주먹이 단추구멍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단추구멍의 몸이 기우뚱하며 뒤로 몇 걸음 밀렸다. 장비가 날쌔게 파고들어 연타를 날렸으나, 단추구멍은 상체를 숙여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했다.
그러더니 냅다 손바닥으로 장비의 턱을 가격했다. 장비가 주춤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단추구멍은 마치 맹수가 사냥감의 숨통을 끊듯 양 손바닥으로 장비의 턱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잠시 후 장비의 눈동자가 허옇게 풀리며 초점을 잃었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황급히 단추구멍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단추구멍의 손이 멈췄다.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던 장비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다행히 장비의 눈동자가 천천히 원 상태로 돌아왔다. 죽지는 않은 듯했다.
“대단해.”
쿤타가 씩 미소 지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야 쟤 죽을 뻔했어. 눈 돌아갔단 말이야. 너에게는 강약 조절이 필요해. 알았지.”
나는 단추구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단추구멍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의 입안은 피로 가득했다. 장비의 주먹이 머리를 스쳤는데 왜 입에서 피가? 혹시 머리뼈가 깨진 건 아닌지.
“너 왜 그래. 입에서 피 나.”
“팔을 정신없이 휘두르다가 그만 내 입을 내 손바닥으로 때려서 그래. 내 손바닥이 맵긴 하네.”
“미친 자식.”
그 이후로 단추구멍과 장비의 서열이 결정 난 줄 알았는데, 장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립군 후예답게 삽자루파는 보복을 준비했다. 겨울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에 장비가 이끄는 홍성 삽자루파와 한 판 더 겨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