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토요일 오후였다. 평소처럼 곱슬의 자취방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간 우리는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방 안에 앉아있던 20대 중반의 여자가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원색 페인트를 칠한 듯 화려했고, 그에 맞춰 머리 또한 노랗게 물들였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누구?”
대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가 나간 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형수님이시다.”
“또 바꿨네. 하여튼 탁월하다. 탁월해. 이젠 아예 살림을 차릴 작정인가 보네.”
쿤타가 비웃음인지 기쁨인지 모를 묘한 표정으로 곱슬을 보며 말했다. 곱슬도 나처럼 우리 몰래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나와 다른 점이라면 상대가 수시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자취방까지 여자를 데리고 온 곱슬이었다. 잠시 후 여자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맛있게 먹으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곧바로 여자는 방에서 나갔다.
자취방에서 처음 보는 밥상이었다. 여자의 음식 솜씨는 그저 그랬다. 곱슬은 우리에게 그녀와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 댔다. 하지만,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곱슬은 정확히 일주일 만에 그녀와 헤어졌다. 그 후로 곱슬이 해미를 떠날 때까지 두세 달에 한 번꼴로 여자가 바뀌었다. 하나같이 20대 중반의 화려한 여인들이었다. 곱슬은 여자를 사귀는 데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곱슬은 오죽잖게 생겼다. 키도 작고, 어깨가 구부정하다. 얼굴도 평범하다. 그런데도 어디서 그렇게 여자들을 데려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채롭게 빛깔로 물드는 다른 활엽수와는 달리, 읍성 안에 있는 회화나무의 단풍은 얌전하게 물들었다가, 조용히 떨어졌다. 갈색으로 물들어 가는 회화나무 밑에 백설공주가 먼저 와 있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 가을 햇살 아래라 그런지 조금은 수척해 보였다.
“잘 맞을지 모르겠네.”
백설공주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 체형에 맞게 줄여주겠다며 가져갔던 잠바와 청바지였다. 일주일 만에 만남이었다. 천여 명이 목매달아 죽은 읍성 안 회화나무 아래였다.
“왜 하필 여기야?”
“너 절에 있는 사천왕상 무서워하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회화나무의 께름칙함과 사천왕상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끔찍한 죽음만 생각하지 말고 이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죽었는지를 생각해 봐.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야. 나에게도 목숨 바쳐 지킬 무언가가 있다면 좋겠어. 아무튼 삶에 지치면 여기에 오래 앉아 힘을 얻어 가.”
나는 멍하니 백설공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라지게 맑은 가을 하늘과는 대조적으로 백설공주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통통하던 볼살이 많이 빠져 턱선까지 드러났다. 살 속에 숨어 있던 쌍꺼풀도 겉으로 드러나 선명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왜 그리 얼굴이 어둡냐거나 살이 빠졌냐고 묻기에는 하늘이 너무나 파랬고, 무엇보다 새로 줄인 옷을 빨리 입어보고 싶었다.
“잠깐만.”
나는 가방을 들고 퀴퀴한 냄새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타이어를 두른 것 같이 펑퍼짐했던 잠바의 허리는 잘록해졌고, 나팔보다 더 넓던 청바지 밑단은 알맞게 좁아져 내 다리 선이 시원스레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다. 청바지 허리춤의 당나귀가 아닌 말머리 상표를. 문득 대호의 청바지가 떠올랐다.
“혹시 대호 것도 네가?”
백설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호의 옷에 붙은 모든 상표가 백설공주 솜씨였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품격 있는 짝퉁이었다. 나는 잠바 가슴팍을 살폈다. 거기에도 작지만 선명한 아식스 상표가 붙어 있었다.
“와 모델 같은데! 정말 멋지다. 멋져.”
“모델은 뭔.”
“아냐 팔다리가 길고, 몸도 날씬한 데다 얼굴까지 작아서, 어지간한 모델보다 훨씬 멋져.”
그러더니 그녀는 허리를 숙여 청바지 밑단을 접어 올렸다. 쿤타가 즐겨 하던 스타일이었다.
“요즘은 이게 유행이거든. 어쩜 남자 몸이 이리 날씬하고 팔다리가 기냐.”
“너한테 이런 말을 들다니. 모루구름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야.”
“모루구름? 혹시 욕은 아니지?”
나는 어려서부터 어떤 구름을 만져보고 싶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유방운이라고 답했고, 먹어보고 싶은 구름을 물으면 하얀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누워 보고 싶은 구름이 무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모루구름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한여름 낮, 땅이 뜨겁게 달아오려면 강한 상승기류가 생긴다. 이 상승기류를 타고 구름이 쑥쑥 자라나 마침내 대류권계면에 이른다. 대류권계면에서 더는 위로 뻗지 못한 구름은 옆으로 퍼져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키가 큰 거대한 구름이 바로 적란운이며, 그 꼭대기 대류권계면에서 모루처럼 옆으로 넓게 펼쳐진 구름이 모루구름이다.
적란운의 일생은 짧고 강렬하다. 사납고 힘 또한 강하다. 마치 신이 빚은 거대하고 웅대한 성전, 그것이 바로 적란운이다. 적란운 속에서는 때때로 신의 거대한 형상이 비치는 듯하다. 신의 재채기 한 번에 천지가 요동치고, 시퍼런 대기를 가른다. 적란운이 하늘을 덮으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나약한 본모습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어야 서너 시간에 불과하다. 빗물에 대지가 식으면 상승기류는 멎고 적란운은 힘을 잃는다. 아랫부분은 뭉게구름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꼭대기 모루구름은 엷게 퍼져 권층운으로 변했다가, 갈고리 모양의 낚시 구름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곱슬보다 한 뼘가량 큰 여자가 곱슬의 자취방에 드나들다가 발길을 끊었을 때쯤부터 아침 공기가 쌀쌀해지더니, 단발의 아담하고 귀여운 여자가 온 날 눈발이 날렸다. 첫눈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백설공주가 정성껏 수선해 준 잠바와 청바지만 입고 다녔다. 겨울 방학 때까지 어떻게든 그 옷들로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몸이 딱 맞게 줄인 탓에 잠바 안에 두꺼운 옷을 껴입을 수 없었다. 추위 탓에 교실에서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나도 대호처럼 손과 발을 달달 떨었다. 대호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추위에 연신 몸을 떨어대자 우리 책상은 덩달아 쉴 새 없이 들썩였다.
“그래 오늘 3시라고 했지?”
아침에 내린 눈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그늘진 곳에만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2주 뒤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 방학이었다. 곱슬이 단추구멍에게 재차 확인했다. 장비가 이끄는 삽자루파가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우리는 다섯인데, 저쪽은 무려 여덟이었다. 아니, 싸움에 끼지 못할 나를 빼면 실제 전력은 넷뿐이었다. 아무튼 머릿수부터가 맞지 않았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내가 걱정스러워 하자 단추구멍이 담담하게 말했다.
“야. 여덟이나 온다잖아! 쿤타와 곱슬은 벌써부터 들떠 있어. 오랜만에 몸 좀 푼다고, 맞아 죽더라도 서로 책임 안 묻기로 했다면서?”
“그렇다고 진짜 사고라도 나면 학교나 경찰이 가만있겠냐?.”
“내 말이 그 말이다. 쟤들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원.”
“일단은 나가서 상황 보고 움직이자.”
대호의 말에 나도 맞장구를 쳤다. 결전을 앞둔 우리는 곱슬의 자취방에서 점심을 먹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그날따라 곱슬이 끓인 어묵탕 맛이 일품이었다. 대호와 나는 두 그릇씩 해치웠다. 하지만 나머지 애들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삽자루파와 만나기로 약속한 읍성 안 팔각정 뒤 소나무 숲으로 향했다. 장비를 비롯한 여덟 명이 정말로 삽을 한 자루씩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비와 그를 따르는 셋 말고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여기가 너희들 무덤이 될 거야.”
장비의 옆에 선 빡빡이가 삽을 어깨에 척 걸치며 말했다. 아침에 면도날로 밀었는지 머리통이 번들거렸다. 그 옆에는 마치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끼처럼 턱이 도드라진 데다, 다른 애들보다 머리를 하나는 더 클 것 같은, 한마디로 괴물같이 녀석이 버티고 섰다. 나머지 애들은 그저 그래 보였다. 삽을 든 모습이 어색했고, 얼굴에는 나처럼 두려움이 깃들었다. 결국, 장비, 빡빡이, 이노끼 대 쿤타, 단추구멍, 곱슬의 3대3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대호는 어느새 내 등 뒤로 물러나 있었다.
“병든닭 얼어 죽겠다. 재 좀 옷을 더 입히든지 아니면 어디 들어가 있으라고 해.”
장비가 나를 보며 이기죽거렸다. 그러자 대호가 자기 잠바를 벗어 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눈치코치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는 대호였다.
“야, 저런 피라미들에게 다 달려들 필요 없잖아. 나 혼자 해결할게.”
뒤에 서 있던 쿤타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가야 아서라. 다친다. 니가 혼자 우리를 상대한다고?”
빡빡이가 갓난아기 달래듯이 말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나에게 100명이든 한 명이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한 놈씩 차례로 확실하게 손보거든. 누구든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그게 나의 첫 번째 표적이야. 자 덤벼!”
쿤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비가 삽을 휘둘렀다. 삽이 쿤타의 등을 그대로 강타했다. 쿤타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만 나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대호는 어느새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차하면 도망갈 자세였다.
“뭐야? 한 대 맞고 가버린 거야.”
장비가 쓰러진 쿤타의 머리를 삽 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곱슬과 단추구멍이 동시에 장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험악한 빡빡이와 거구의 이노끼도 그들에게 맞서며 다가왔다. 바로 그때, 쓰러져 있던 쿤타가 용수철처럼 땅을 박차고 일어나 순식간에 팔로 장비의 목을 감아 등에 업히듯 매달렸다. 쿤타의 손놀림이 마치 오락실 슈팅 게임인 갤러그의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곧이어 쿤타가 장비의 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축 늘어진 장비는 잘린 통나무처럼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당황한 빡빡이와 이노끼가 장비를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장비의 몸은 문어처럼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다음은 너.”
쿤타가 섬뜩한 눈빛으로 빡빡이를 가리켰다.
“야, 임마! 정신 차려! 몸이 불덩이 같아!”
장비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노끼와 빡빡이는 잠시 허둥대더니, 이내 거구인 이노끼가 장비를 들쳐업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장비를 따라왔던 나머지 애들도 꽁무니를 빼며 줄행랑을 쳤다.
“야 진짜 뭔 일 나는 거 아냐?”
걱정스러운 얼굴로 단추구멍이 쿤타에게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쿤타는 손에 쥔 드라이버를 단추구멍에게 보여주었다. 쿤타는 싸움뿐 아니라 연장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다. 장비의 등에 매달렸던 그 짧은 순간, 드라이버로 서른여덟 번을 찔렀다고 했다. 1분에 150번까지 찌를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손놀림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그냥 가볍게 침을 놨을 뿐이야. 곧 깨어날 거야. 장비 녀석은 자존심 빼면 시체거든. 다시는 해미 근처에 얼씬도 못할 거야.”
겨울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쿤타의 말대로 별다른 문제는 터지지 않았다. 그리고, 장비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자퇴한 것이었다. 그놈의 같잖은 자존심이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