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추억
"Sheila"실라.
그녀를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내 어깨에서 조금 더 내려간 지점에 멈춰 선 작은 체구에 유리알 같은 안경을 걸치고 짧고 빛바랜 듯한 노란 머릿결을 가진 "My wee granny" (마이 위 그라니)
나의 자그마한 할머니.
지금도 여전히 안부를 물어오고 생일이면 작은 봉투에 선물을 돌돌 말아 넣듯 해서
빽빽하고 작은 글씨체로 써 내려간 카드에 언제나 몇 파운드 지폐를 담아 함께 보내주는
섬세하고 다정한 나의 친구.
그녀를 통해 나는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 내 안에 있던 감성들이 깨어 살아나곤 했다.
그 많은 사진 속 추억과도 같은 장면들 속에
언제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분.
내 인생에 그녀가 들어와 얼마나 값진 것을 주고 있는지. 아마도 그녀는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특유의 귀여운 말투로 때로는 경쾌하고 유쾌하게 때로는 단호하지만 친절하게 나에게 가르쳐 주고 들어주고 설명해 주는 그 지혜로 인해 나는 살면서 처음 경험 하는 것들이 많다.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적절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내가 마치 친절한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식탁 위에 펼쳐 둔 작은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찾아가며 진지하게 몇 날 며칠 몇 주 걸려 완성해 나가는 모습이랄지, 아침마다 똑같이 생긴 작은 토스트 하나를 구워 스스로 잘 만든 그 마말레이드 잼을 얇게 펴 발라 맛있게 차와 함께 드시는 모습이랄지. 그녀만이 가진 일상적인 모습들조차 나에게는 잔잔한 평온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가끔씩 뭔가를 뜨개질해서 우리 집 막내의 스웨터를 만들어 주고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땐 작은 비닐봉지에 우리가 늘 마시던 티백을 넣어 그리움을 달래어 주시기도 할 만큼 실라는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을 담아 보내주었다.
나는 실라의 사랑을 먹으며 살았다.
추운 겨울에도 그 따뜻한 사랑에 살았다.
지독한 코로나 기간 동안 집 밖을 나갈 수 없을 때에도 멀리 떨어져 다른 도시에 사는 나에게 그녀는 슈퍼에 온라인으로 주문한 손수 고른 야채들과 과일이 든 상자를 그때그때 조금씩 달리해서 정기적으로 보내주셨다. 그걸 받을 때면 오래된 컴퓨터 앞에 앉아 작은 안경을 당겨 쓰고 미간에 힘을 주어 집중하면서 하나하나 주문했을 자그마한 몸집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가지 오이 토마토 양파 망고 딸기 사과 우유 리크(기다란 두꺼운 파) 계란...
나는 태연하게 그 상자를 받아 고마워하며 그 기간을 버텼다. 내가 그 고마움을 갚으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고스란히 우리를 사랑하는 그녀의 깊은 사랑은 언제나 감사하면서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참 신기했다. 대부분 내가 누군가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것들은 부담이 되어 돌아오곤 했는데 실라에게만큼은 아니다.
나를 오해하지도 않으며 내게 고마운 인사받는 것도 또 안 받는 것도 매한가지처럼 여기는 그녀로 인해 나의 마음은 깊어졌다.
우리는 함께 애니메이션을 보며 웃기도 하고 여러 번 반복해서 보던 어린이 영화를 보며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실라를 보고 있으면 그녀를 만드신 하나님께 고마워하게 된다. 이런 분이 어떻게 계신 걸까 어떻게 나의 인생에 이런 만남이 있을까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실라를 알고 지내고 만났더라면 더 나는 자유롭고 많은 부분에서 편안해졌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 작은 집 곳곳에 귀엽고 앙증맞은 보기 드문 장식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있고 특히 크리스마스 때는 오랜 시간 가지고 있던 장식들이 빛을 내며 온 집안을
아늑하고 기분 좋게 해 주었다.
실라는 그것들을 잘 관리하고 해마다 꺼내어
마치 작은 인형의 집이 꾸며진 것처럼 완벽하게 느껴져서, 나는 성탄 분위기를 느끼기엔 실라의 집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정하고 따스한 실라.
언제나 들어도 다정한 목소리로 기도를 해주고 나의 마음을 전할 땐 눈물을 흘리고
재밌게 말할 때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사랑스러운 실라. 사랑하는 실라.
내 깊은 마음에 깊은 사랑을 주고 언제나 씩씩하도록 격려해 주는 그녀.
나는 실라를 만난 것이 가장 큰 선물과도 같고 스코티쉬 그라니 (Scottish granny)
실라는 나와 내 가족에게 축복이다.
크고 작은 학교 행사와 운동회가 열리면 비가 와도 비를 맞고 서서 우리 집 막내의 달리기를 응원하고 따사로운 날이면 호젓한 곳에 피크닉을 데려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자신의 집 앞 현관계단에 둘이 쪼그리고 앉아 진지한 얘기들을 나누기도 하는데 여상치 않은 교감과 깊은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보였다.
분명 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 그을린 얼굴의 시골아이 같은 유일한 코리안인 우리 아이를 보면서도 같은 반 백인 아이들은, 얼굴 희고 노란 머리에 갈색눈을 한 실라가 우리 아이의 친할머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너희 할머니냐"라고 묻기 일쑤였고 아이는 "예스"라고 답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들의 순간순간 속에 들어와 함께했다.
나의 스코티쉬 그라니 실라를 빼고 스코틀랜드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잠시 멀어져 있어도 때가 되면 만나고 찾아가고 찾아오며 길게 길게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내 가슴에 가느다란 실이 달려 실라와 이어져 있어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서로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으며 언제나 그리워하고 언제나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춥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웠던 숱한 날들 속에서도 나는 실라로 인해 지금까지도 이렇게 영국에 남아지지 받으며 살고 있다.
You don't know how much blessed you come into my life...
[네가 내 인생 들어온 것이 얼마나 나에게는 축복인지 너는 모를 거야]
그녀가 자주 카드에 편지에 썼던 말들이다.
그 말은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사랑과 우정.
전화기 너머로 기도를 해주고 나를 돌봐주는 사랑하는 그녀가 지금도 스코틀랜드 마을 끝에 살고 있고 여전히 서로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안부를 물으며 지내고 있다. 언제든 나는 실라를 찾아갈 것이고 또 언제나처럼 그녀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토스트를 구워 먹고 티를 마시며
굿모닝을 맞이하고 데려가 주는 곳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어디서든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선한 이웃들에게 나도 미소로 인사를 나눌 것이다.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to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unto you
The Lord lift up the light of his countenance upon you and give you peace"
Amen.
*위의 게재된 그림들은 제가 직접 그린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