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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중요성을 묻는다면: 에밀리 디킨슨

문학은 무한한 가능성 속에 존재하기에

by River


나는 가능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가능 속에서 살아간다-

산문보다 더 아름다운 집이고-

더 많은 창문을 가졌으며-

문도 더 다양하고 흔하다


한눈에는 담기 어려운

소나무와 같은 방들-

그리고 지붕으로는

닳지 않을 하늘-


방문객들로 말하자면- 가장 멋진 부류이고-

여기서의 일-바로

내 작은 양손을 활짝 펼쳐

낙원을 모아 오는 것이다-


I dwell in Possibility –


A fairer House than Prose –


More numerous of Windows –


Superior – for Doors –



Of Chambers as the Cedars –


Impregnable of eye –


And for an everlasting Roof


The Gambrels of the Sky –



Of Visitors – the fairest –


For Occupation – This –


The spreading wide my narrow Hands


To gather Paradise –





"문학은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왜냐하면 무한한 가능성 속에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It] dwell [s] in Possibility”)라고 하며 모든 인문학도를 대변합니다.


디킨슨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눈부십니다.


일단 연이 진행될수록 읽는 이에게 허락되는 시야가 더욱 넓어지죠.

마치 평범한 문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문이 열리면 그 집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삼나무를 방으로 삼고 하늘을 지붕으로 삼아 한계를 모르는, 기준도 정답도 없는 공간이 열립니다.


그럼 바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I. "A fairer house than Prose"

산문보다 더 아름다운: 문학을 물리적 공간으로 생각해 보다


문학이든 산문이든 모든 종류의 글은 종종 그 자체가 세계로 표현됩니다. 페이지라는 범위 내에서 모든 단어들은 저자의 목적에 따라 조심스럽게 선별되고 그 목적에 엄격히 국한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다시 말해서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문학과 산문 모두 "세계"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세계의 종류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킨슨이 말했듯이 문학은 산문보다 훨씬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죠. 산문은 사실, 현상 등과 같이 확실한 모든 것을 서술하는 반면, 문학은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들은 들어라"는 식으로 독자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고, 그저 혼자만의 노래를 부르며 다른 이들이 따라 부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뿐이죠. 다른 멜로디와 감정으로 불리기를 기다리면서요.


II. "I dwell in Possibility"

나는 가능 속에서 살아간다-문학(시)이 제공하는 가능성에 대하여


문학이라고 뭉뚱그리기는 했지만 여기서의 Possibility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시"를 뜻합니다. 디킨슨이 시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전 문학으로 이해하기로 했어요. 시뿐만 아니라 소설들 또한 무한한 가능성 속에 머물러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모든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목적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독자의 의도와 완전히 동떨어진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지만 작가의 의도와 완전히 다르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관점을 통해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기에 문학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또 무한한 가능성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누가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시시각각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띄우니까요.


또 그 무한한 가능성 속에는 상상력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죠. 예를 들어, 독자들은 디킨슨이 이 시를 쓰기 위해 앉았을 때 날씨가 어땠을지, 이 '집'의 멋진 이미지를 상상하며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요.


이와 같이 디킨슨의 시에 국한되는, 표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상력을 훨씬 넘어서는, 문학의 힘을 의식하여 가능성의 무대 위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상상할 수도 있겠죠. 아래와 같이, 디킨슨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어요.


전 이 시를 읽을 때면 언제나 압도적인 동일한 인상에 휩쓸립니다. 그것은 바로 숨이 멎을 것 같다는 기분입니다. 겨울 바닷가에서 짧은 호흡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에요. 바람이 너무 강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숨을 쉬는 것과 같은 것인데, 왜인지 이 시를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더군요. 마치 바다로 옮겨진 것 같은 기분이에요. 아마도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단어로 인해 제가 생각하는 무한함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언제나 광활하고 굉장하다고 생각하는 겨울 바다, 짧고 조심스럽게 숨을 쉬는 느낌, 이 두 가지가 머릿속에서 지배적인 이미지로 떠오릅니다.


III. "to gather Paradise": 낙원을 모으다


디킨슨은 최고의 치어리더예요. 그녀는 어떻게 된 건지 항상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해주지요. 때문에 전 기분이 안 좋거나 삶이 힘들어질 때 에밀리 디킨슨을 마치 성경처럼 읽곤 해요. 그리고 그것은 유독한 긍정( toxic positivity*)이 아닙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그것을 정직하고 중립적인 목소리로 관찰을 할 뿐입니다. 그저 그 담백한 목소리로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알려주면서 제 안에서 희망과 열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냅니다. 객관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제 삶과 인간, 지구, 자연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죠. (예를 들면: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 작은 돌멩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toxic positivity: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가 아닌 모든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긍정과 낙관을 가지고 삶을 대하는 태도.


IV. 시 해설


이 시에서의 화자는 "시"라고 생각해요. "시"가 말을 하고 있는 거죠. 내가 살아가는 곳은 바로 무한한 가능성 속이라고요. 그리고 본인을 산문과 비교를 하면서 창문과 문들이 많다고 말을 해요. 즉, "시"를 "집"으로 표현을 한 것이죠.


어떤 시이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라는 "집"에 들어가야 해요. 그런데 만약 그 집(시)의 창문은 작고, 문도 한 개밖에 없다면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고 그 시를 이해하기 어렵겠죠. 들어가는 방법이 단 한 가지뿐이라는 말이니까요. 즉, 특정한 단어를 특정하게 이해해야만 하고, 다양성은 허용되지 않는 산문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글이겠지요. 반면, 디킨슨이 그린 이미지와 같이 만일 창문이 많고, 문도 많고, 심지어 크기도 크다면 그 집에 들어가는 방법은 아주 다양할 것이에요. 그런 시라면 각 독자의 상황과 성격에 따라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방문객들로 말하자면- 가장 멋진 부류이고-
여기서의 일-바로
내 작은 양손을 활짝 펼쳐
낙원을 모아 오는 것이다-


이 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독자들인데, 이 방문객들은 가장 멋진 부류예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죠, 여러분?)


그리고 시의 역할은 낙원을 모아 담는 것이에요.

단어들을 모으고 조심스럽게 선별하여 만들어진 낙원 그 자체가 시니까요.


사실 전 꽤 오랫동안 이 시의 화자를 디킨슨으로 이해했어요. 아니면 적어도 시인이라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시인이 아니라 시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이해를 하면 모든 독자들이 읽는 것만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맛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시인이라고 이해를 하더라도 말이 돼요. (시는 산문이 아니잖아요? 정답은 없다는 말이죠!)

시인은 무한한 가능성 속에 살아가면서 언뜻 보면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것으로 끝나는 현상이나 물체 같은 것들을 엄청난 것으로 바꾸어버리니까요.


정확한 해석은 차치하고서라도, 전 이 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무한한 가능성을 이미지화한 것이에요. 사실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하면 집이 아니라 저 멀리 상상할 수도 없는 그냥 공기 속에 있는 어떤 무언가를 상상하는데, 집이라는 공간 안에 무한함을 담았다니, 그리고 그것을 또 단어로 구체화시켜 시로 셨다니, 정말 굉장하지 않나요? (여러분들의 무한한 가능성은 어떤 모양의 집인가요?)




V. 번역에 대해:

나희경 번역가의 "에밀리 디킨슨 시 읽기"을 참고했습니다.


제가 이해한 원시를 바탕으로 번역본의 단어들을 조금 바꾸고, 시의 틀보다도 뜻이 더 잘 전달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희경 번역:

나는 가능 속에 거주한다

그건 산문보다 더 아름다운 집이며-

더 많은 창문을 가졌고-

문들에 있어서도 -보다 더 우월하다-


내실로 말하자면 삼목처럼-

시선에 대해 난공불락이며-

그리고 영원한 지붕으로

하늘로 된 맞배지붕을 가졌다-


방문객들로 말하자면-최고로 매력적이며-

직무에 있어서라면- 이건-

내 좁은 양손을 활짝 펼치는 것이다

낙원을 모아 받아 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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