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e New World: Aldous Huxley
올더스 헉슬리의 "Brave New World"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 속 대사입니다. 섬에만 살던 미란다가 난파선에서 내린 육지 사람들을 보며 기쁨에 차 외친 말입니다. 세계국으로 함께 가자는 말에 희망으로 가득 찬 존 또한 이 대사를 인용하지만 막상 도착한 세계국은 정반대의 현실을 보여주죠.
I. 유토피아: 모두가 행복한 계급 사회
토마스 무어가 처음 사용한 유토피아 eutopi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eu (좋은) 과 topia (곳) 이라는 것을 합친 것인데요, utopia*는 그리스어로 "없는 곳" (no place) 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어 또한 유토피아란 모두가 꿈꾸는 곳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유토피아란 정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기보다도 마치 예언가처럼 현대 인류의 존망을 그려냅니다. 대량생산과 자본주의가 이끈 인류의 타락, 그 어떤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 완벽하지만 암담한 인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영원할 것 같았던 위대한 하느님 그리고 세기를 넘나들던 셰익스피어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사회가 대신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국의 1920년대 렌리 포드는 컨베이어 밸트 방식의 대량생산을 통해 자동차 생산을 혁신적으로 증가시켰는데요, 다른 산업들의 대량생산으로 이어지며 자본주의의 극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미국을 방문한 헉슬리는 물건을 무한으로 찍어내는 광경을 보고 언젠가 미래에는 인간 태아의 대량생산까지도 가능할 것이라는 무서운 상상을 바탕으로 멋진 신세계를 써내려갔습니다.
이 작품이 출판되었을 1930년대 (최초 발행일: 1932년 2월 4일)에는 사회비판보다는 말 그대로 신세계적인 sci-fi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58년 헉슬리는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라는 비판서적을 통해 본인이 상상한 미래가 훨씬 빠르게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0세기 중반에 가깝다고 느낀 인류의 변화가 21세기인 오늘날은 코앞까지 다가온 것 같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과학 판타지 소설로서의 접근이 아닌 사회적인 접근으로 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어떤 식으로 인류를 지배했을까요?
세계국(World State)의 지배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기보다는 9년간의 전쟁 (The Nine Years' War)을 통한 결과입니다. 세계 경제가 무너진 이후 발생한 이 전쟁은 화학 무기까지 곁들인 폭력적인 사건이었으며 결국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은 항복을 하였습니다. 세계국의 정권 아래, 인간 복제*와 행복 약물(soma), 수면교육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합니다. 이와 더불어 그 어떤 형태의 불행 혹은 불안정을 없앰으로써 사회 또한 완전히 안정시켜버리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고, 나이 들어 쇠약해지는 현상도 없앰으로써 신에 대한 필요성이나 일체 호기심도 시작되지 않도록 합니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다면 과도한 감정으로 인한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에 사랑은 물론, 가족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헉슬리가 만들어낸 이 세계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병(bottle)에서 탄생합니다. 인구의 수를 조절할 수도 있고, 각 인간들의 사고 수준을 조절할 수 있으며, 탄생 후에도 수면 중의 최면을 통해 엄격한 관리 아래에서 사고를 합니다. 이 세계에는 총 5개의 계급이 존재하며 각 계급들은 본인의 위치에 한 치의 불만을 갖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2번째로 상위 계급인 베타는 수면 중의 최면에서 알파의 삶은 피곤하다고 주입이 되며, 가장 하위 계급인 엡실론은 기본적인 사고조차 하지 못하도록 태아의 상태에서 산소의 수치를 낮춰 지능 수준에 한계가 있죠. 따라서 계급 간의 갈등은 전혀 일어나지 않죠: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라고 했습니다. 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하고자 한 말인데요, 멋진 신세계처럼 계급 투쟁이 존재할 수 없는 세계라면 비판할 사회의 시스템은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죠.
물론 이런 완벽한 세계에서도 돌연변이는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세 명의 돌연변이가 등장하는데요, 알파인 Bernard와 Helmholtz 입니다. 두 명 모두 알파라는 최상위 계급에 속하지만 Bernard는 알파의 우월한 신체적인 특징은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는 작고 못생긴 남성 알파인 반면, Helmholtz는 정말이지 완벽한 알파입니다. 그럼에도 이 둘은 이 세계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서로 정반대의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Bernard는 알파이지만 왜소한 체격으로 그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알파이기에 본인의 욕망과는 별개로 결국은 스스로 세상을 적대시하는 방법으로 자기 방어를 하는 불쌍한 인물입니다. 반대로 Helmholtz는 이 세계에서 극작가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요, 머리가 너무 좋은 나머지 각종 교육에도 불구하고 발현된 창의성을 통해 사회 속 돌연변이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Bernard는 부족함에 의해 돌연변이가 된 것이고 Helmholtz는 과도함에 의해 돌연변이가 된 것이죠.
세 번째 중요 인물은 야만인 John 입니다. 소설 중반부쯤에 등장하는 존의 첫인상은 마치 영웅과도 같습니다. 야만세계에서 태어났지만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에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고상한 말투까지, 척박한 세상에서 피어난 인류의 구원자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전개에 따라 독자들은 존 또한 그저 역사 속 하나의 파편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가 하는 말들은 아름답지만 그저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좋은 세상'의 개념이 셰익스피어의 극들을 통해 확립되었기에 고집스럽기도 하며, 환상만을 추구하는 인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세계국의 인간 복제와 수면교육의 광경을 목격한 이후부터는 점점 영웅은 커녕 정상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쾌락에 지지 않고자 야먄세계의 종교에서 가르친 자해를 일삼으며 결국에는 자살을 합니다. 존이 매일 같이 읽던 셰익스피어의 비극적인 결말을 택한 것입니다. "Brave new world"를 외치며 세계국으로 도착한 존을 맞이한 것은 정말로 멋진 신세계가 아닌 지옥이었던 것입니다 :”Hell is empty and all the devils are here” (The Tempest, Act 1, Scene 2).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주도성을 가진 인물은 세계국의 지배자 Mustapha Mond입니다. 그는 셰익스피어는 물론 인류의 인문과학은 꿰뚷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세계국을 떠나지 않고 지배자가 되겠다는 주도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몬드는 존이 내세우는 세계국에 대한 반박과 비난에 대해 차분한-하고 논리적인 답변을 제공합니다. 마치 실낙원에서의 사탄처럼 분명히 틀리다고 생각했던 전제를 옳은 것이라고 설득을 하죠. Mond씨는 사탄만큼이나 아름답고 정교한 이유를 들며 이 세계의 정당성을 설명하는데요, 반면에 존이 내세울 수 있는 주장은 그저 괴로움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문장들을 읊을 뿐이죠.
반박 1. 셰익스피어는 아름답습니다.
존이 가장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왜 세계국의 시민들은 문학을 즐기지 않느냐입니다. 세계국에서는 셰익스피어나 밀튼 대신 "feelies" 라는 영화를 즐기는데요, 향부터 시작해서 감촉까지 모든 자극들을 수동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면서도 소설처럼 집중력을 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세계국의 전략 중 하나로, 시민들이 단 한 순간의 생각조차 할 겨를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몬드는 인정하죠- 셰익스피어가 아름답다는 것을. 하지만 또 말합니다:
비극은 불안정 속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느끼는 시도를 통해 그 작은 행복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 신세계는 불안정함이 존재하지 않기에 행복을 얻고자 하는 시도가 없다. 행복은 정말 과대평가된 요소이다.
불행 대신 행복을 제공하는 정권에 대해 어떤 반박이 가능할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치인을 뽑는 기준 또한 유권자의 안위와 행복을 얼마나 챙기느냐인데 말이에요.
반박 2. 신을 왜 없나요
존은 도대체 왜 그 어떤 시민도 신을 안 믿느냐고 물어봅니다.
발전된 과학은 늙지도 아프지도 않은 화학 제품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죽기 전까지 젊고 아름다운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쇠약함을 경험하지도 않으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신에 대한 필요성도 없다. 하지만 그보다도 홀로 있는 시간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이기에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고 이에 따라 호기심도 갖지 않는다.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게 될 기회가 없기에 신에 대한 궁금증도 시작되지 않는다.
반박 3. 이 계급 사회는 옳지 않다
존을 정신나가게 한 요소 중 하나가 세계국 시민들의 유아적인 생활방식인데요, 도대체 왜 한 순간의 욕망을 참지 못하고 약물 중독으로 살아가고 왜 생각을 하지 않는 비참한 삶을 택하느냐고 분노합니다. (세계국에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는 계급은 알파와 베타뿐, 그 외 감마, 델타, 엡실론들은 복제를 통해 인지 지능이 저하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몬드는 웃죠. 모든 계급들의 개인들이 행복한데 왜 불공평한가? 그들은 각자의 수준에 알맞게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델타, 감마, 엡실론들은 모두 탄생할 때부터 인지지능이 3살짜리로 맞춰지기 때문에 그들은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소마(soma)만을 소비하며 살아가지만 이에 대한 불평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그 어떤 계급 혹은 개인을 탄압하지 않는다.
대량생산, 대중매체와 같이 한 종류의 대중을 상대로 상품을 제공하는 사회는 20세기에 등장하여 한 세기간 진행되어왔습니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와 같이 인간 복제가 존재하는 세계는 아니지만, 세계국만큼이나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수동적이라는 비판이 이어져왔습니다 9-to-6의 노동 이후 퇴근 후에는 대중매체에서 정의하는 '즐거움'을 그대로 즐겁다고 받아들이고, 소셜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추구해야하는 삶'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동기부여를 받죠. 오늘날의 세상에는 더 이상 대중적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대중매체는 점점 더 수동적인 대중의 입맛에 맞춰서 끊임없는 오락을 제공하며 사실상 우리들은 혼자 있지만서도 실제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흔치 않죠. 생각을 하려면 혼자 있어야 하는데, 세계국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혼자 있는 시간 없이 살아가며, 친밀한 관계는 짐으로 여기고 있죠.
폭력적인 탄압을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들과는 다르게 멋진 신세계는 쾌락 제공만으로 정권을 유지합니다. 물론 9년간의 전쟁을 통해 강압적으로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몰살하며 새롭게 시작된 정권인데요, 실제 미래에는 9년간의 전쟁의 필요도 없이 자율적으로 쾌락을 선택하고 자유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