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그림자에 대해 살펴보자. 이 꿈에서 L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자극한 R의 성욕은 ‘산 위의 무성한 나무들’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쉽게 말해,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어두운 욕망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당시 R의 그림자였을까? 사실 이것은 그림자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사소하고 민망한 수준이다. 인류 전체의 집단무의식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R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던 다단계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당시 R은 다단계로 수억 원이 넘는 돈을 잃었다. 이 사업은 직급이 올라야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였기에 원금을 회수하려면 지인과 가족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경쟁도 치열했다. 말이 많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던 R의에게 이 사업은 천직처럼 보였다. 누구보다 큰 성공을 원했던 R은 누구보다 열심히 이 일에 매달렸다. 그동안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며 모은 돈에 대출까지 받았다.
그러다 R은 이 사업을 나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이것이 사기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회사 대표가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R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상위 직급자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서야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가 수익을 줄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대출까지 받아 하위 가입자들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다. 환불을 요청했지만 이미 돈은 사라진 뒤였다. 이때부터 R은 완전히 무너졌다. 특히 R이 불법 다단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의 시선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회사 동료들까지 R을 피하기 시작했고 이 고립감은 극심한 트라우마로 이어졌다. 그때 R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사기를 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야.”
돌이켜보면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 R의 무의식에는 타인을 짓밟아서라도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분명히 존재했다.
입원 전의 R은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고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사치가 심해 항상 비싼 옷만 고집했다. 하지만 늘 돈이 부족했다. 그런 R 앞에 다단계라는 신기루가 나타난 것이다. 다단계는 R의 이러한 그림자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타인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생각이, 그림자라는 집단무의식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R은 다단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다만 30대 초반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러한 경험을 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이처럼 융이 말한 그림자는 우리의 어두운 욕망이며 외부의 자극에 의해 언제든 표면으로 드러나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사실 그림자는 페르소나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다. 그림자를 무조건 억압하면, 그 어두운 에너지가 오히려 페르소나를 잠식해 사회적 기능을 붕괴시킬 수 있다. 반대로 그림자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의식과 통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숙한 페르소나로 전환될 수도 있다. R의 경우 출세욕이라는 그림자를 공무원 시험이라는 건설적 방식이 아니라 다단계라는 파괴적 방식으로 충족하려 했기에 혹독한 대가를 치룬 것이다.
사람들이 다단계에 인생을 거는 이유는, 함께 다단계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의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 7-12>에서 설명한 그림자의 집단적 동조, 즉 동기화 현상의 심리학적·양자역학적 실체다(08화 그림자: 군중 심리의 집단적인 동조.)
R이 다단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나와 함께 밴드에서 함께 활동하던 30대 여성 때문이었다(당시 나는 대학생과 직장인으로 구성된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었다). 당시 R은 나의 소개로 이 30대 여성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그 여성을 통해 다단계를 알게 되었고, 나를 제외한 R과 밴드의 모든 멤버들이 이 다단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당시 공무원이었던 나는, 나의 형이 통장을 관리하고 있었기에 이 사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통장을 관리했다면, 나 역시 R처럼 다단계로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 우리는 그녀의 안내로 설명회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만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의심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강사의 현란한 강의가 시작되자 모두 빠져들고 말았다. 곧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이 퍼졌다. 매달 수천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생각과 무엇보다 수많은 미녀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욕망이 나와 R을 사로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참석자들 역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단계를 경멸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거의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기묘한 분위기가 너무나 생생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백여 명의 생각이 하나로 수렴되는 현장.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진동을 내던 수십 개의 소리굽쇠가 하나의 주파수로 공진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이는 서로의 생각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나타나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