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임금의 질투심을 자극하다
세종대왕님의 마음을 분석하다
by 카사노바의 생존 심리학 Apr 2. 2026
다음으로 세종 시대에 조선의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킨 장영실에 대한 과도한 처분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모든 독자들의 엄청난 분노를 자아낼 수 있어 무척 조심스럽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전공한 사학자가 아니다. 단지 프로이트와 융 심리학, 그리고 뇌과학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하찮은 공무원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의 설명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셨으면 한다.
세종은 과학기술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기계를 제작하려 했는데, 이 일을 장영실이 누구보다 잘 해냈다. 즉, 세종의 머릿속 생각을 장영실이 실제 눈에 보이는 물건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때문에 세종은 누구보다 장영실을 총애했다. 실제로 그의 손을 거친 유명한 과학기구가 정말 많다. 특히 1437년에 그가 발명한 시계인 옥루에 대해 『세종대왕실록』의 저자 박영규님은 이렇게 말한다.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그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박영규의 『세종대왕실록』 중 ―
이처럼 장영실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조선의 과학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당연한 보답으로 장영실은 천민임에도 조선 역사상 가장 크게 출세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대단한 업적을 남긴 장영실은 어느 순간부터 실록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바로 1442년 3월 16일, 가마를 잘못 만들어 파직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보고 나는 정말 의아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장영실을 총애하던 세종이었기 때문이다. 가마가 부서진 것을 가지고 불경죄라는 대죄를 씌워 아끼던 신하를 내치다니. 장영실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던 황희나 고약해에게는 너무나 관대했던 세종이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록에서는 황희와 같은 대신들의 강요에 못 이겨 내린 처분이라고 하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물론 왕이 탄 가마는 왕의 안전을 위해 정말 신경 써서 튼튼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왕 중심의 나라였던 조선 시대에 가마가 부서진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조선 시대 당시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만들 수 없던 정교한 과학 물품을 만들었던 장영실이, 상대적으로 훨씬 단순한 가마를 부서지게 했다는 사실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사실 장영실은 가마의 안전성에 대해 미리 경고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감독관이었던 조순생은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라며 이를 묵살하고 만다(이후 장영실에 대한 과도한 처분과는 달리, 장영실의 경고를 무시한 조순생에게는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는 점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모 TV 방송에서는 당시 (장영실을 통해) 빠르게 발전하는 조선의 과학기술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중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나름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당시 세종의 머릿속에 직접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이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알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융 심리학의 집단무의식인 그림자를 적용해 본다면 의외로 그 이유를 쉽게 알 수가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장영실의 뛰어난 능력에 대해 세종 본인조차도 알지 못하는 집단무의식, 즉 어두운 그림자(장영실에 대한 질투심)가 투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 모두가 인정했듯이 세종은 임금이었지만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는 수불석권(手不釋卷)하는 독서 생활로 당시 그 어떤 뛰어난 학자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세종은 나름의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과학 지식을 실제의 물건으로 만들어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짠’ 하고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신이 났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장영실이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원하는 물건들을 척척 만들어내니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아마도 세종의 편도체가 크게 자극받았고, 앞장에서 말한 감정중독회로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의 증폭 현상까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에는 장영실을 더는 키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른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를 내칠 수 있는 구실이 생긴다. 바로 가마가 부서진 사건이다. 정말 별일 아니지만(물론 당시에는 정말 큰 일이었겠지만), 이 일을 구실로 장영실을 내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뜻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종 본인이 천민이었던 장영실을 양반으로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세종의 마음속에 일종의 인지부조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어쩌면 세종은 자신이 아끼던 장영실을 어쩔 수 없이 내쳐야 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황희와 같은 대신들을 이용해 어쩔 수 없이 그를 내친다는, 일종의 감정적인 연기를 한 것은 아닐까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천민 출신임에도 과학 분야만큼은 세종을 능가했던 장영실에게 세종은 분명 그의 질투심이라는 편도체의 어두운 그림자를 투사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다음은 1442년 3월 16일의 기록이다. 장영실의 불경죄에 대하여 정승 황희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죄는 불경죄에 해당하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다른 사람들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박영규의 『세종대왕실록』 중 ―
세종실록에서 장영실에 대한 기록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세종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인물이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유독 장영실에 대한 처벌만큼은 세종의 빛나는 업적에 대한 옥에 티로 남는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만일 장영실이 천민 출신이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 이렇게까지 심한 처벌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심한 죄를 저질렀던 양반 출신 황희와 고약해에게 했던 관대한 처분이 이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