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낯선 천장과 낯선 가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것이 드라마라면 분명 내 옆에 누군가가 함께 누워 있겠지만 나는 혼자고 드라마 같은 일은 현실에선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가 이제 내 집이라니, 모든 게 어색했다. 화장실도 세면대도 침대도 가구도 모두 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캐리어를 풀어 고이 모셔 온 나의 흔적들을 곳곳에 채워 넣었다. 물건들이 채워지니 이제 좀 내 집 같았다. 하나씩 가지고 온 물건들을 정리를 하다 보니 또 필요한 것들이 생겨났다. 옷을 걸다 보니 옷걸이가 부족하고 등받이 쿠션도 하나 있으면 좋겠고 수저통도 하나 필요하고 등등. 결국 나는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또다시 다이소와 마트를 오갔고 어느새 그렇게 오후가 순식간에 다 지나가 버렸다.
둘째 날까지도 나는 동네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마트와 다이소만 계속 왔다 갔다 했다. 나는 마트까지 최단거리로 갈 수 있음에도 일부러 빙 둘러갔다. 그러면서 그 동선 사이에 있는 분식집 위치와 치킨집 위치, 스타벅스와 투썸의 위치까지 파악했다. 버거킹, 맥도널드, 써브웨이 같은 패스트푸드는 뭐 말할 것도 없지.
어머. 그러고 보니 다 먹는 거잖아. 내 시선이 왜 요식업에만 꽂혔는지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인간이 고립되면 뭐가 가장 먼저 생각나겠는가. 바로 먹을 거다. 낯선 환경에 나의 뇌가 고립됐다고 생각했는지 어쩜 그렇게 식당 간판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어맛! 순대국밥집도 있네.
나는 서울살이 이틀 만에 동네의 많은 식당 정보에 대한 빅데이터를 구축하며 나름 의미 있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어째서인지 일할 때 보다 요즘이 더 피곤하다. 백수가 되면서 기본 만보에서 이만 보 가까이 걷고 있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통장 잔고보다 무릎연골이 더 먼저 닳을 판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문득 농담 같던 그 속담이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나는 욱신거리는 무릎에 물파스를 바르며 내일은 조신하게 6000보 정도만 걷기로 다짐했다. 분명 내 무릎이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야무지게 물파스를 챙겨 온 나의 선구안을 칭찬해.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초저녁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나는 대충 저녁을 챙겨 먹고 평상시보다 일찍 잠에 들었다. 적응이 좀 된 것일까. 둘째 날은 그래도 잠이 잘 왔던 것 같다.
관광객으로 모드변경
나는 드라마 작법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 왔고 엄밀히 말해 나의 서울살이 목적은 관광이 아니라 수업이다. 내가 듣는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있고 그날을 제외한 날은 아무 일정이 없다.
주 6일 휴무라니 세상에 이럴 수가...
가만, 근데 이제 난 뭘 하지?
관광이 목적은 아니지만 서울까지 와서 방구석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나는 어쩔 수 없이 관광객으로 잠시 모드를 바꿨다. 근데 막상 관광하려니 딱히 떠오르는 데가 없었고 결국 인터넷으로 서울 명소를 검색하다가 멋진 사진에 매료되어 그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숙소 근처에 지하철이 있었고 웬만한 서울 명소는 지하철로 다 갈 수 있었다. 나는 얼른 그곳으로 향했다.
코엑스에 위치한 별마당 도서관. 사진이 멋있어서 보려고 갔지만 어디 있는지 찾느라 애를 좀 먹었다. 나는 방향치 길치라 지도를 보면서 찾는 것도 꽤 헤매는 편이다. 누가 관광지 아니랄까 봐 외국인 관광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내가 해외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곳이 교보문고 같은 서점인 줄 알았는데 뭔가 책을 사거나 독서를 하는 느낌보다는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전부 책은 안 읽고 핫스팟에서 사진 찍기 바빴다. 물론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서울에서나 찍을 수 있을 법한 관광용 사진들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반응이 좋았다. 역시 사진 명당이야.
관광지에서 사진 찍기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아다녔는데 혼밥 하기 적당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맥도널드로 들어갔지만 꽉 들어찬 사람들과 대기 줄을 보고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손님들 중 외국인이 반이었는데, 왜 한국까지 와서 귀중한 한 끼를 맥도널드에서 해결하는 건지 첨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나도 미국 가서 햄버거 먹다가 질리면 김밥천국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맥도널드 진입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간단하게 샐러드를 사 와 먹는 것으로 만족했다.
추억여행
나는 수업 전까지 최대한 관광객모드를 즐기기로 하고 다음 행선지를 정하던 중 예전에 살던 곳을 가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 좋은 생각인데? 나는 바로 다음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아침이 되자 뭔가 모르게 설렜다. 유명한 관광지를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가 살던 동네에 도착해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동네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신기하게도 그 장소에 가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은 나를 그 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말이다. 요 며칠 피곤하기도 했고 크고 작은 스트레스 때문에 좀 지쳐 있었는데 몸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몸이 아니라 마음이 편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묘하면서도 좋았고 들뜨고 신나는 감정을 함께 느꼈다. 유명관광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런 감정과 여운이 있었다. 역시 나의 추억여행은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 당시,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기억들은 아무렇게나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 한구석에 쿡 처박혀 있던 기억의 조각조각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숙성에 숙성을 거듭하더니 이제와 내가 다시 꺼낼 때는 묵은지처럼 잘 익은 소중한 추억이 되어있었다. 기억에 세월을 더하면 추억이 되는구나. 그리고 그때 내가 알던 공간들이 그대로 남아있음에 감사했다. 그때 나의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지금은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겠지만 나에게 추억을 선물해 준 그 사람들이 어디서나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밥은 먹어야겠지. 나는 미리 찾아둔 혼밥 가능한 맛집으로 가서 오래간만에 밥 다운 밥을 먹고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 작법 수업이 코 앞이니 미리 워밍업은 좀 해두어야겠지.
나는 나만의 세계에 빠져 말도 안 되는 글을 신나게 써 내려갔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즐거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보여줄 일 없으니 뭐라고 쓰든 태클 거는 사람도 없고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되니 안 신날 수가 없다. 미리미리 즐겨놔야 한다. 이제 배움의 길로 들어서면 깨질 일만 남았을 테니까.
그렇게 주 6일 휴무인의 삶으로 여기저기 누비다 보니 어느덧 대망의 수업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관광객모드에서 빠르게 학생으로 모드를 바꿨다. 드디어 곧 수업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