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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화 Oct 08. 2024

여기 쌩백수는 저뿐인가요?

시간 부자


나는 회사가 망한 김에,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드라마 작법 수업을 듣기로 결심한 뒤 일사천리로 서울에 단기 숙소를 구하고 시나리오 학원에 수강 신청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매달 학원비보다 몇 배나 비싼 월세를 내며, 배보다 배꼽이라는 속담을 굳이 몸소 실천하게 된다.


이왕 서울에 온 김에 어떻게든 뽕이라도 뽑고자 관광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차에 드디어 수업 날이 다가왔다. 나는 수업 전날, 숙소에서 학원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봤는데 마침 한 번 만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물론 버스정류장까지 10분 정도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하루 3시간 동안 진행되는데 수업을 듣다 보면 생각보다 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학원에 등록하기 전부터 수강생들의 연령대가 가장 궁금했는데 우리 반은 거의 전 연령대가 다 있었다. 웹소설과는 다르게 드라마는 수강생들의 연령대가 좀 높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20대가 가장 많아서 놀랐다.


나이가 들수록 그 바닥에서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성별은 여성이 압도적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수강생들은 다양한 연령대만큼 직업군도 다양했다. 학생, 주부, 직장인, 그리고 백수(나)까지. 자기소개 시간을 통해 파악해 보니 놀랍게도 여기 쌩백수는 나 혼자라는 결괏값이 나왔다.      

그렇구나. 다들 바쁘시구나. 여기에서 내가 제일 한가한 인간이었구나. “괜찮아. 시간이 많은 만큼 글도 많이 쓰면 되지.”라고 생각한 과거의 나는 머지않아 곧 깨닫게 된다. 시간이 반드시 작업량과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글이라는 건 시간이 많다고 무작정 써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어떤 작가들은 하루 평균 만자 이상씩 혹은 7~8시간씩 글을 쓴다는데 어떻게 하루에 그만큼의 이야기가 머리에서 나오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나도 나름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고 어딜 가나 나 이상의 존재들이 곳곳에서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좌절감과 열패감을 주기도 했지만, 때론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나에게 파이를 먹을 능력이 있는가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기 싫어 더욱 그들의 존재를 찾으려 했다. 재미있다는 드라마를 찾아보기도 하고 소설을 추천받아 읽기도 했다. 나는 남들이 주말에나 시도할 법한 드라마 몰아보기 같은 걸 매일 실행할 수 있는 백수가 아니던가. 백수의 최대 장점을 살려 우물 안을 탈출하려 했건만. 아... 멀어져 간다. 나의 꿈이... 파면 팔수록 진짜 드럽게도 잘 쓰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만약 드라마를 보는 게 나의 취미에만 그친다면 이런 멋진 작품을 써 재미와 감동을 준 작가들은 나에게 고마움의 대상일 테지. 하지만 이게 나의 꿈이라면 이 작가들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이들로 인해 내가 설 자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과 경쟁해서 정해진 파이의 한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경쟁력이 나에게 있는가. 나는 아마도 나에게 재능이 있나 없나를 따지며 매일매일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긍정 회로를 돌려보자. 나에게 작가는 꿈인 것은 맞지만 반드시 도달해야 할 목표는 아니다.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허상을 말하고 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은 그대로 꿈으로 남는다. 실패가 아니라 단지 꿈을 경험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앞으로의 수업에 임하기로 했다.


이게 뭔 개소리냐. 기껏 보따리 싸서 서울까지 올라왔으면 목숨 걸고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생명이 무한대 생성되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다. 생명은 하나뿐이고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꿈 하나에 목숨까지 걸면 실패했을 때 나는 어찌 되는가. 꿈도 소중하지만 그것이 나보다 우선하진 않는다. 내가 있어야 꿈도 있는 거니까.


나도 한 때는 처절하게 꿈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열정이란 말로 포장하면서 밤을 새우던 날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끝내 꿈이 잡히지 않았을 때의 그 허탈감은, 슬럼프라는 큰 구덩이를 만들었고 나를 그 속에 밀어 넣었다. 어쩌면 나는 그 구덩이를 나오는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을 것이다. 꿈에 나를 갈아 넣지 않을 것이다. 꿈을 향한 나의 마음은 가벼울 것이나, 진지할 것이며 주어진 환경에서 그저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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