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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화 Oct 11. 2024

칼을 뽑았으니 이제 호박을 썰 차례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한 흥미로움


어떤 것이든 처음 배우는 것은 확실히 흥미롭다. 다리던 작법 수업 마침내 시작되었고 수업은,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다른 어떤 것들 보다도 색다른 장르의 배움이었다.  소설은 한글을 알고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성을 떠나 누구든 일단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따로 공부를 하지 않고는 쓰기 조차 쉽지 않다.  물론 책을 보고 독학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부딪히며 배우기를 선호하는 편이라 독학을 하다가 결국 대면 수업을 선택했다.

 

수업 시간에는 시나리오 보는 법과 기본적인 시나리오 용어들에 대해 공부했다. 일반 소설과는 달리 시나리오에는 다양한 전문 용어들이 나오는데  그 용어들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알아야 그 시나리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용어부터 야 했다.


시나리오의 대지문 쓰는 법에 대해서도 배웠는데 특징적인 것은, 지문은 될 수 있으면 각적 정보만을 담아 메라에 담을 수 있는 부분만 간략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독자가 책에 빠져들게 하는 흡입력이 중요하기에 작가의 필력이 정말 중요한 요소이지만 시나리오는 필력이 화려하지 않더라도 소재와 구성, 대사가 좋으면 얼마든지 연출로써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수업은 흥미로웠다. 학원에 오기 전 유튜브나 대본집, 작법서를 보며 혼자 공부를 했기 때문에 아는 내용도 있었지만 내가 혼자 공부한 내용이 맞다는 걸 확인하는 것도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혼자 공부하면서 긴가민가했던 부분들에서 답을 얻게 되니 이래서 다들 돈 주고 학원에 오는구나 싶었다. 수업을 듣고 나니 당장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에 수업이 끝나고 학원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태블릿으로 일단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썼다. 역시 카페가 글이 잘 써져. 기성 작가들이 멀쩡한 집구석 놔두고 카페로 뛰쳐나가는 이유가 있다니까. 너무 조용하면 잠도 안 오는 나 같은 사람들은 카페의 적당한 백색소음이 집중력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나는 카페에서 2시간 정도 글을 쓴 뒤 집으로 향했다.      


나만 아는 노력의 징표     

드라마 작법 수업은 6개월 과정이고 4-5개월 후에는 70분 단막 하나를 제출해서 합평을 받아야 한다. 나는 그것을 목표로 작품 구상을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사실 나는 시나리오 수업을 듣기 전에도 시간이 날 때면 소설 비슷한 걸 쓰곤 했다. 물론 출판사에 투고하거나 웹소설 사이트에 올린 적은 없다. ‘소설’이 아니라 ‘소설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흉내만 냈을 뿐 누구에게 보여 줄 만큼의 어떤 것은 안 된다는 뜻이다.


나는 전에 일을 할 때도 퇴근하고 시간이 날 때면 틈틈이 그 소설 비슷한 글을 계속 썼었고 마침내 결말까지 이야기를 완성했다. 물론 어디에 보여 줄 정도의 작품성이 있는 것은 아니나 나에게는 그것조차도 몹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들이 내가 만든 세계관 안에서 지지고 볶고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며 울고 웃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결'.


완성도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결말까지 나온 그 이야기를 저작권 사이트에 등록했다. 아무도 볼 것 같지 않고 완성도조차 떨어지는 이야기를 저작권까지 등록한 이유는 그동안 나의 노력에 대해 눈에 보이는 징표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라톤 대회에 참여해서 끝까지 완주하면 작은 메달을 주지 않나.

그 메달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끝까지 완주한 노력에 대한 보상이자 상징적인 징표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쓴 첫 번째 이야기는 대략 A4용지 550장 정도 되는 분량인데 처음 쓴 거라 이게 분량이 많은 건지 적은 건지 알 수 없다. 550장이나 쓰긴 했지만  그것은 시나리오의 형태도 아니고 소설의 형태도 아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대사 많은 트리트먼트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틈틈이 간 날 때마다 1장 2장씩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썼던 것이 어느새 550장이 되어버렸다.  만약 누가 나에게 처음부터 550장이나 되는 방대한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면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런 게 티끌 모아 태산인가 보다.

아무튼 70분 단막이 A4 기준 35 매니까 이 550장은 절대 단막극에 담을 수 없는 분량이다.


그렇다면 과제를 위해서는 단막극에 어울리는 소재로 새롭게 글을 써야 한다. 아직 수업 초기이고 단막 극본 제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단막에 쓸만한 소재에 대해 생각했다.

1시간 정도 되는 분량에 기, 승, 전, 결 다 갖추어진 이야기를 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기, 승에서 뿌린 떡밥을 언제쯤 회수해야 좋을까? 기, 승에서 일어난 갈등을 전, 결에서 해소시킬 수 있을까? 기에서 승으로 넘어갈 때 개연성이 없지는 않을까? 전, 결에서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이 허무하거나 억지스럽지는 않을까? 나는 스타벅스에서 아이패드의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대체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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