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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꺼내 입는 계절

by 봄날의꽃잎

아침 공기가 달라졌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바람엔 차분한 냄새가 묻어난다.

그 변화는 언제나 옷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여름의 얇은 셔츠들이 뒤로 밀리고,

니트와 코트가 서서히 앞으로 나오는 계절.


거리엔 트렌치코트가 늘어나고,

브라운 톤의 옷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가을엔 이렇게 입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약속이라도 있는 듯,

사람들은 닮은 색으로 걸어 다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꼭 가을에는 브라운 톤을 입어야 할까?

왜 코트 자락을 휘날려야만 가을이 되는 걸까?

계절은 매년 찾아오지만,

나는 매해 같은 내가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문득 내 옷장을 들여다보게 된다.

아침과 저녁은 서늘해 겹겹이 옷을 껴입다가도,

낮의 햇살 아래서는 금세 덥다며 단추를 풀고

가디건을 벗어버리게 된다.

가을은 언제나 이렇게 겹옷의 계절이다.


생각해보면, 내 삶도 늘 그러했다.

엄마라는 옷, 원장이라는 옷, 아내라는 옷.

하나둘 늘어나는 역할들이 겹겹이 쌓이며 나를 감쌌다.


어떤 옷은 따뜻했지만,

어떤 옷은 벗어내기 어려운 무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루의 끝에서 남는 건 결국,

‘나’라는 본래의 옷 한 벌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옷장 속의 옷들도

어느새 나의 시간과 역할을 닮아 있었다.


몇 해 전 가족여행 때 입었던 청재킷,

아이들과 운동회 날 함께 뛰던 바지,

빨래 널던 오후의 햇살 냄새가 배어 있는 셔츠.


오래되어 색이 바래도 그 옷들엔 내 시간이 묻어 있다.

그걸 꺼내 입는 순간, 나는 기억을 꺼내 입는다.


그날 놀이터에서 아이의 손을 잡던 따뜻한 손끝,

합창 연습이 끝난 저녁의 서늘한 공기,

퇴근길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본 노을빛.


그 순간,순간들이 옷의 주름 사이에 조용히 숨어 있다.

그래서 나는 새 옷보다 오래된 옷을 더 사랑한다.

그 안엔 내가 지나온 계절이,

그리고 내가 조금씩 단단해진 흔적이 있으니까.


그 기억들은 여전히 내 옷을 고르는 기준이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가을엔 트렌치코트를 입어야 하고,

베이지나 브라운이 어울린다고.

하지만 나는 그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행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의 온도다.

기분이 좋은 날엔 원피스 위에 니트를 걸치고,

마음이 무거운 날엔 후드티를 입는다.

패션은 나에게 유행이 아니라,

마음을 정돈하는 방식이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의 나는 어떤 색으로 살고 싶은가.”

베이지처럼 따뜻하게,

회색처럼 조용하게,

혹은 와인빛처럼 단단하게.

그날의 나를 감싸줄 색을 입는 일,

그게 나에게 하루를 열어주는 의식이다.


가을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 계절을 어떻게 입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나는 유행 대신 마음을,

트렌드 대신 나를 입는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가을의 옷은 몸을 덮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덮는 일이라는 걸.

겹겹이 입은 역할과 기억 속에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옷은

‘나’라는 한 벌뿐이다.


오늘도 나는 그 옷을 조용히 꺼내 입는다.

햇살이 내려앉은 길을 걸으며,

내 안의 가을이 천천히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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