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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당신을 사랑하고 있나요?

by 마른틈

이맘때쯤이면 계절 옷 정리를 해야 한다. 사실 옷 정리를 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아마 9월 중순쯤? 나는 계절마다 옷 정리를 두 번씩 하는데, 긴긴 여름을 지나 한풀 꺾인 더위가 아침과 저녁에 기세 좋게 들이미는 선선함에 한 발짝 밀리면 얇은 긴팔과 카디건을 꺼내고, 유독 손이 자주 가지 않던 여름옷은 미리 넣어둔다. 그리고 완연한 새 계절을 맞을 즘이면 얼마쯤의 요란을 떨며 다시 한번 계절 옷 정리를 마무리한다. 그중에서도 가을은 참으로 짧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두 번째 옷 정리를 할 시기가 래하는 것이다.


나는 옷을 꽤 잘 입는 편이라 생각한다. 난데없이 자기 PR이라 조금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사정은 이렇다.

나는 내 외관을 꽤 정확하게 알고 있다. 키가 작고 팔다리는 더 짧다. 피부는 파운데이션 17호를 쓰는 적당히 하얀 편.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속 쌍꺼풀을 가진 얼굴은 순하고 흐리멍덩해 보이는 탓에 각종 삐끼와 “도를 믿으세요”등에 잡힌 팔목만 몇 번인지 셀 수 없다. 맞다. 좋게 말해서 ‘순하게 생겼다’고 하는 것이지, 그냥 만만하게 생긴 거다.

어느 날은 갑자기 그게 너무 싫어서, 나이 삼십이나 먹고 뒤늦은 쌍꺼풀 수술을 했다. 인상이 좀 강렬해지고 싶어서. 이왕 할 거면 예쁘고 젊었던 스무 살 때 할걸, 그땐 너무 겁이 많았다. 다만 십 년을 걸려 준비한 마음이 무색하게도 그 수술은 그다지 나의 인상을 강렬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여전히 삐끼들은 나만 보면 승냥이처럼 좌표를 찍고 달려드니 말이다.


하여간에 키가 작고 그에 비해 더더욱 짧은 팔다리 덕분에 나는 참 뭘 입어도 옷태가 안 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골몰하다 보니 체형을 커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나는 옷을 잘 입는 게 특별하고 유니크하거나, 명품을 둘둘 휘감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체형에 어떤 스타일과 길이가 잘 어울리는지, 어떤 색이 얼굴을 환하게 밝혀주는지. 그저 나를 잘 알면 되는 일인 것이다.


이쯤에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잘보이고 싶어 심혈을 기울여 그날의 패션을 준비했으리라는 것을 안다. 다만 사람이 많은 퇴근 시간의 지하철역 앞에서 올빽 정장을 차려입고, 윤이 반들반들한 황토색의 구두(게다가 그 구두의 앞코는 새의 부리처럼 아주 뾰족했다), 웬 카우보이 같은 모자…. 심지어는 조금 부담스럽게 낑긴 바지 앞섶까지. 나는 두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라 도로록 도로록 눈알을 굴리며 하염없이 발끝만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미안합니다만 제발 아는척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니까, 나는 남이 평소에 무슨 포댓자루를 걸치고 다니든 별로 신경은 안 쓰는 편이지만, 나와의 관계성이 성립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이성을 볼 때 단언컨대 얼굴은 보지 않는다. 아예 안 본다면 거짓말이니까 흔히 말하는 ‘키스는 할 수 있을 정도’를 기준으로 잡으면 될 것 같다. 굳이 이상형을 따지자면 ‘적당히 체격이 있고 듬직하며, 서글서글한 인상의 뿔테 안경을 쓴 곰돌이 푸’ 정도가 변하지 않는 취향이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나의 전남친들은 대부분 말랐었다. 그리고 남편도 말랐다. 아무래도 이생에는 그른 모양이다. 그럼 이상형에 맞지도 않을 이들을 왜 만났냐고 묻겠지. 나는 ISTP다. 잇팁들은 대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꽂히는 포인트가 있다. 그들도 그랬을 뿐이다.(참고로 현 남편은 '이게 내 말에 감히 자꾸 반박을 하네?' 라며 꽂혔다.)

하여간 전남친들은 대부분 옷을 못 입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남의 패션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입는 건 못 입는 거다. 생긴 걸 뜯어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옷은 뜯어 입힐 수 있으니, 나는 늘 그들의 손목을 붙잡고 남성 의류매장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내 체형이나 잘 알고 내 옷이나 잘 입지, 남의 을 컨설팅해줄 만큼의 능력자는 되지 못한다. 그래도 뭘 입혀도 그 거적때기보다는 낫겠지…. 싶은 마음인 거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기도 하다. 마른 체형이라면 ‘마르게’ 입히지 않으면 그뿐이니까. 그렇게 나의 컨설팅(?)을 받고 사람이 되었던 전남친들은 모두 각자의 인연을 찾아 떠났다. 그들의 현 여친들은 아마 모르겠지. 너희 애인 옷 꼬락서니 그 정도라도 된 건 다 내 덕분이다. 전여친 작품이라고 들어봤니?


하여간에 나는 옷은 때와 상황에 맞춰 입는 게 진짜 잘 입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TPO 말하는 거지.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맞는 옷차림은 매우 중요하다. 여자친구는 전날 밤부터 야심 차게 데이트룩을 준비했는데, 대충 헤진 후드 집업을 걸치고 삼선쓰레빠나 질질 끌고 나오는 인간이라면, 일단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른을 뵙는 자리에 풀어헤친 모습도 보기 예쁘진 않다. 아무리 그사이가 막역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 역시 어린 날의 어느 때에는 이런 것들을 잘 몰라서, TPO에 맞지 않을 차림이었던 적도 종종 있다. 허나 나이가 들고 사회 물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들 아니겠나.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것을 알면 굉장히 유용하다. 나는 수년간 확신의 봄 웜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난데없이 여쿨이라 진단받고는 사용하던 화장품과 색이 맞지 않는 옷을 전부 버렸다. 아까워도 어쩌겠는가, 그것들이 나를 우중충하게 만든다면 굳이 착용할 이유가 없는 거지.

잠시 들른 액세서리 매장에서는 찰떡같이 나와 어울리는 것을 골라내는 안목이 생겼다. 어떤 이론적인 부분보단, 그저 많이 해보니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일단 많이 해봐야 한다.

깔끔한 것도 중요하다. 나는 어느 시점부터 옷을 직접 다려입기 시작했다. 물론 소재마다 다르겠지만, 빳빳하게 다려진 깃이나 부러 낸 각이 잡힌 주름 같은 포인트는 단순히 깔끔함을 넘어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나는 한때 이것이 결핍이었던 적이 있기에, 유달리 집착하는 편이다.

바깥 활동 중 의도치 않게 생긴 얼룩이야 별일도 아니지만, 그것을 알고도 지우지 않고 다음에 또 입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전날과는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최소한 상의라도. 깔끔한 헤어와 손톱 관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닿는 나의 은밀한 시선들이 조금 결벽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것들은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들이 아니다. 주에 한번 손톱을 정리하고, 달에 한번 미용실을 가는 일. 세탁물을 세탁기에 방치하지 않는 일.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 이것들은 전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다니는 단골 수선집이 있다. 어느 바지도 제 길이에 입어본 적이 없고, 때에 따라 늘어지는 소매 역시 잘라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재봉틀을 산 이후로는 간단한 길이 조절 정도는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나의 단골 수선집에 들른다.

15년을 넘게 봐온 아주머니는 멀리서 다가오는 나를 볼 때마다 “아휴 우리 공주 또 왔네ㅡ”라며 반겨주신다. 자주도 들러선 “이 길이가 나을까요? 조금만 더 줄일까요? 다리 길어 보이고 싶은데!”라며 수선을 떠는 나를 얼마쯤 귀찮아하다가도, 어느새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적당한 길이를 추천해 주신다.

원래는 부부가 함께하셨는데, 노령해지신 할아버지께선 은퇴하시고 아주머니 혼자 남았다. 나는 그곳에 가면 괜히 한 번은 더 요란을 떨고, 수다도 떨다가 어느새 다 고쳐진 옷을 받아든다.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테니, 나의 단골집도 오래오래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도, 당신을 조금 더 존중해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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