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의 목욕탕은 사랑방이었다

by 봄날의꽃잎


골목길을 따라 걸어다니다보면

웃음을 나오게 하는 그림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두맹이골목은 2008년 제주공공미술사업에

당선되면서 예술가들의 작품공간이 되었다

벽화그림 덕분에 한때는 관광객들로

북적북적 거렸다

그러나,

코로나는 골목에서 사람들을 사라지게 했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 고개를 들었다.

담벼락 가득 그려진 사람들.

작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웃고 있었다.


이곳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이다.

50년 넘게 이 골목을 지켜온,

이제는 골목의 시간 자체가 된 장소.

지금은 영업은 하지 않는다


어릴 적,

나는 엄마 손을 꼭 붙잡고

동생들과 이곳에 오곤 했다.

겨울이면 목욕탕 문을 여는 순간

김이 훅 끼쳐 올라오고,

입김과 수증기가 뒤엉켰다.


대야가 바닥을 긁는 소리,

"등 좀 밀어줘요" 하던 익숙한 목소리,

수증기 너머로 들려오던 어른들의 웃음과

목욕탕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


그곳은 씻는 공간을 넘어서

진짜 ‘동네 사랑방’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소식을 나누고,

때로는 고단한 하루를 흘려보내는 곳.


목욕을 마친 뒤엔

기다리던 작은 보상이 있었다.

출입구 옆 냉장고에서 꺼내주던

요구르트 한 병.


가끔은

친구 엄마가 세모 모양 우유를 건네주셨다.

“이거 마셔~ 넌 작으니까 더 먹어야 해.”

그 우유는 요구르트보다 조금 더 비쌌고,

그래서일까,

왠지 더 특별하고 고급스러웠다.

빨대를 쏙 꽂아 마시는 순간,

그날의 피로도, 땀도,

하루의 소란도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언젠가 그 따뜻했던 목욕탕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목욕을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서

수두가 퍼진 적이 있었다.


우리 네 자매도,

옆집도, 또 그 옆집도

하루 이틀 사이에 다들 몸에 열이 오르고

작은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

하얀색인지 분홍색인지 약을 바르고

우리 네 자매가

나란히 누워 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정말

마을 전체가 함께 앓았던 것 같다.

문득 그런 기억까지

골목을 따라 걷다보니 떠오른다.


지금 이 벽화에 그려진 사람들은 웃고 있는 것처럼

그 웃음 너머에는

기쁨과 피로,웃음과 열,

정성과 정이 모두 쌓여 있었다.


목욕탕은 때로는 전염병의 무대였고,

때로는 골목 소문이 시작되는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으로 다시 갔다.

등을 맡기고, 마음을 나누고,

다시 몸을 씻기 위해.


지금은 조용한 골목.

굴뚝엔 연기가 오르지 않지만,

그 수증기와 온기,

그리고 건네받던 우유 하나의 따뜻함은

아직도 이 길 위에 살아 있다.


나는 오늘도 이 길을 걷는다.

작은 손으로 엄마를 붙잡고 걷던

그 시절 나를 떠올리며,

김 서린 유리창 너머로 피어나던

동네의 사랑방을 다시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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