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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기 Aug 24. 2021

[목격자] | 에스프레소

오후 4시 대학가에서 벌어진 두 여자의 싸움을 목격했다.

누구에게나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진하디 진한 에스프레스는 나의 오래 된 취향 중 하나다. 처음 에스프레소를 맛보게 된 것은 유학생 시절 캠퍼스 앞 작은 카페에서였다. 낯선 곳에 와서 물정도 어둡고 언어도 서툴고 주머니 사정도 어렵던 나는, 친구들을 따라 들어간 카페 메뉴판에서 제일 저렴한 메뉴를 골라 더듬거리며 주문하였다. 커피가 생각보다 너무 작은 잔에 나온 것을 보고 당황하였고, 이를 맛보았을 때에는 충격을 받았다. 작은 잔 안에 든, 검은색에 가까운 액체가 견딜 수 없이 써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고난이 엑기스의 형태로 나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혹시라도 제일 싸다는 이유로 커피를 고른 것이 티가 날까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앞의 음료를 홀짝였지만, 마치 사약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 심정이었다. 그것이 원두가루에 뜨거운 물을 고압으로 통과시켜 뽑아낸 에스프레소라는 것을, 미국인들은 거기에 대부분 물이나 우유를 넣어 마신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고국에 돌아와 번듯한 직업을 갖게 된 지금, 가격 걱정을 하지 않고 메뉴를 고를 수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종종 에스프레소를 찾는다. 지독한 쓴 맛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었달까. 때로는 작은 잔에 담긴 검은 색 액체를 바라보며 바다 건너 이국적인 흑인 여자들이 원색의 천을 머리에 두르고 커피콩을 따는 장면을 상상하곤 한다. 이 작은 한 잔의 커피를 뽑아내기 위해 그 누군가는 얼마나 고되게 노동하는가. 나는 전혀 부담 없는 돈을 지불하고 타인의 고난을 음미할 자격을 얻는다. 이국 여자들의 고된 삶이 응축되어 있는 이 검은색의 액기스를  나는 한 모금에 털어넣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짜릿해진다. 


그렇다. 본래 고귀한 것들은 크기가 크기 않은 법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내 배 밑에 깔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 계집애는 영 나의 취향이 아니다.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허리춤에 두툼하게 내려오는 살들을 보니 영 흥분이 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익숙하게 애무를 하고 나의 요구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무래도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년 같다. 강의가 끝나고 랩 미팅이 있기 전 잠깐 짬이 나서 오랜만에 여흥을 풀어볼까 하고 들른 곳인데, 나는 집중을 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자꾸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아 이따 대학원 신입생 환영회가 몇 시였더라. 이번에는 제법 쓸 만한 애가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다들 고만고만해서 그런지 면접 때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나는 여자의 엉덩이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Y에 대해서 떠올렸다. Y야말로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아이였다. 작고 가녀린 체구에 수줍게 웃는 미소가 마치 제비꽃 같았지 아마. 


계집애의 퉁퉁한 배 위로 나의 엑기스를 쏟아내는 것을 끝으로 나의 작은 여흥이 끝났다. 제대로 꼴리지 않은 탓에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굳이 뭐라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씻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구질구질하게 성을 낼 가치조차 없는 섹스였다. 아무래도 돈을 주고 섹스를 하는 것은 영 구미에 맞지 않는다. 이런 인스턴트식 자극보다는 강렬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해보이지만 강한 한 방이 있는 그런 경험이 있으면 좋겠다. 한때는 아내가 나에게 그런 기쁨을 선사해주리라고 기대했었다. 아내는 매력적인 외모에 시원한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다만,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고 대신 아내의 얄팍한 깊이에 실망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그래. 아내는 커피로 따지면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었다. 아주 더운 여름날, 한 입에 훅 털어 마시고 나면 금세 바닥을 보이는, 그래서 얼음물이 섞여 밍밍해진 커피를 빨대로 쪽쪽 훑어야하는 비참함을 선사해주는 그런 사람. 머리가 깨지도록 시원했던 짧은 순간을 기억하며 그 곁을 떠나지 못할 뿐, 나의 취향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다. 살면 살수록 그렇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는데, 저녁 장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가게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 져 보이는 니트 숄과 가방을 걸치고 있는 중년의 여자가 수수한 차림의 젊은 여자와 싸우고 있었다. 아니,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늙은 쪽이 젊은 쪽을 일방적으로 쏘아붙이며 화내고 있었다는 쪽이 더욱 맞을 듯싶다. 언뜻 늙은 여자의 입에서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와 같은 상투적인 대사가 흘러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늙은 여자는 젊은 여자를 늙고 보잘 것 없는 손으로 사정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보석이 반짝 빛을 내다가 젊은 여자의 옷 덜미 사이로 사라진다. 젊은 여자의 몸이 그 손길에 따라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반격할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매를 맞고 있는 젊은 여자의 텅 빈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는 착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저 곁눈질로 그들을 훑어보며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일면식 없는 두 여인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이 내게는 무의미할 뿐더러 뭣보다 고기 지린내가 풍기는 골목에 오래 있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득 몇 년 전 아내와 Y가 싸우던 모습을 떠올랐다. 


Y는 몇 년 전, 내 밑으로 들어 온 대학원생이었다. 지방의 타 학교에서 서울의 우리학교로 진학하였기 때문에 지도 교수인 나의 각별한 관심을 필요로 하였다. 물론 비슷한 조건의 다른 학생들보다 그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은, 그녀의 외양이 나의 취향에 매우 부합했을 뿐더러,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단한 투지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풍족하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힘겹게 공부를 이어오던 강단과 갖은 구박에도 주눅 들지 않는 씩씩함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정복을 했나 싶다가도 정복할 거리가 남아있는 것처럼 여지를 주는 Y의 태도 때문에 나는 오래도록 애 닳아했다. 처음 그 아이를 품었을 때, 승리감에 얼마나 짜릿했던가. 평소답지 않게 주의가 흐트러져 아내에게 덜미를 잡힌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나와 Y의 관계를 알아버린 아내가 연구실까지 찾아왔고, 아내는 그대로 Y에게 돌진하여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나는 감히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장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현실감이 너무나도 없어서 마치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을 시청자가 되어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Y의 등짝 위로 사정없이 내리 꽂히는 아내의 손바닥, 아내의 손길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Y의 몸, Y의 초점 없는 눈동자, 아내를 말리는 손들, 절규하는 아내의 입. 


현장은 어떻게든 수습했지만, Y는 그 길로 종적을 감춰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녀의 본가를 찾아가볼까 하다가 말았다. Y 앞에서 구질구질해 보이긴 싫었다. 다만 오늘같이 돈을 주고도 기분 좋은 섹스를 하지 못한 날에 Y가 조금 보고 싶을 뿐이다. Y의 옴폭한 배 위에 누워 다정한 말들을 나누고 싶다. Y도 나를 그리워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많은 것들이 망가졌지만, 아내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넥타이를 챙겨주는 아내를 보면서 그래도 교수 아내라는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아내를 원망할 수는 없다. 단지 자신의 시시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내가 불쌍할 뿐이다. 


아까 그 거리에서 한참 벗어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멀리에서 싸우는 소리가 여전히 메아리 쳐 들린다. 늙은 여자 쪽에서는 이제 울분에 겨운 소리를 짐승처럼 뿜어낸다. 저렇게 화가 날 정도로 상대는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뭐가 되었든 거리에서 저렇게 싸우는 것이 영 천박하게 느껴진다. 못 배운 사람들 같으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지만,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기 전에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셔야겠다. 





- 효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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