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정김 Aug 16. 2021

[목격자] | 누구의 싸움

오후 4시 대학가에서 벌어진 두 여자의 싸움을 목격했다.

19년 인생 중 내가 이렇게나 주목받았던 때가 있었나.


민정이는 지유의 메시지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 눈 떠보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어느 나이 든 배우 아저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이런 게 그 비슷한 걸까 싶었다. 그 아저씨도 지금 같은 세상이면 그때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민정이는 지유가 보내 준 메시지에서 파란 링크를 눌렀다.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웃긴 사진이나 움짤, 화제가 된 영상 같은 것들을 편집해 올리는 SNS 유머 계정으로 연결됐다. 유사한 종류의 계정들 중에서도 팔로워가 무려 20만에 달하는 인기 상위 계정이었다.


대낮 먹자골목에서 벌어진

여자 둘 개싸움

(추가 목격자도 찾습니다)

좋아요 16,395

댓글 358개


아무것도 없는 흰 배경 위에 자극적인 몇 마디로 축약된 민정이의 글이 내용만큼이나 시선을 끄는 크고 굵은 글씨로 무성의하게 박혀 있었다.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왼쪽으로 넘기자 사이사이 몇 줄이 빠진 채로 캡쳐된 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정이는 자신이 쓴 글을 다시금 한 장씩 공들여 읽어 나갔다. 상상하기 좋게 잘려진 8장의 정사각형 퍼즐 같았다. 이 문장을 빼고 캡쳐하면 안되지 싶은 부분이 있다가도 끝까지 읽고 나니 원문보다 가독성이 훨씬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보고 기억하고 있는 장면보다 더 생생한 막장이 연출되고 있었다. 언젠가 100장 찍어 1장 건진 야경 사진에 유명한 멜로 영화 대사를 적어 올린 게시물이 156개의 좋아요를 받은 적이 있었다. 150개 남짓한 좋아요에 그렇게나 기뻐했는데, 이건 뭐 싸움이 안되는 게임이었다. 어쨌거나 이 또한 자신이 쓴 글이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다.


민정이는 SNS에서 나와 글 원문이 올려진 커뮤니티 사이트로 들어갔다. 조회수는 어느덧 10만을 육박하고, 댓글은 천 오백 개가 넘은 상태였다. 자신이 또는 친한 지인이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여럿 나타났다. 어제 자기 전까지도 댓글만 보다 잠들었는데 하룻밤 새 어제 달린 댓글의 두 배가 늘어나 있었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둘의 사연을 더 상세하게 추측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그 여자 둘을 잘 알지도 못하는 민정이를 댓글 여기저기서 소환하고 있었다.


- 한 쪽만 일방적으로 맞았나요? 맞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반항했다거나 아니면 울었다거나 빌었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는지?
- 어린 여자 생김새나 차림새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음
- ㅇㅇ 대사 같은 것도 좀 더 자세하게 말해주면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음
- 몸싸움 나기 전 상황은 모르나요?
- 근데 그 정도로 누가 심하게 맞고 있었으면 누구 하나는 신고하거나 말려야 정상 아닌가? 쓰니는 고등학생이라 어려서 뭘 모른다고 해도 어른들은 없었는지 왜 신고 안했는지 궁금
- 남 싸움에.. 다들 참 할 짓도 없다.


신기함과 뿌듯함에 사로잡혀 댓글을 읽어나가던 민정이는 어느 순간 심장이 마구 뛰는 게 느껴졌다. 가족들에게, 또 다른 친구들에게 내가 올린 글이라 자랑해야지 싶었다가 한편으로는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싸운 것도,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도 아닌데 뭔가 잘못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 글을 이렇게나 본 거지, 괜히 자진해서 대표로 글을 올리겠다고 했나 후회가 되었다가 내가 글을 꽤 잘 썼나 싶기도 하고, 대학교 수시 때 이 게시물을 어떻게 써먹을 순 없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저 익명의 사람들, 커뮤니티에 들어온 몇몇에게만 의견을 물어보려 했던건데 이 정도는 정말 예상치도 못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결과같기도 했다. 그날 떡볶이 집에 둘러앉은 민정이와 그녀의 친구들도 그때만큼이나 활기를 띤 적이 없었으니까.


이틀 전 민정이는 수능 모의고사를 마친 후 친구들과 즉석 떡볶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 모의고사는 영어가 너무 어려웠다느니, 어차피 내신만 챙기면 된다느니, 고3인데 인간적으로 체육은 좀 빼줘야 되는 거 아니냐느니 따위의 이야기를 심드렁하게 나누며 대학가 먹자 골목을 지나고 있을 무렵 그 소란이 들려왔다. 민정이와 친구들을 비롯한 골목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골목에서 기세 등등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악을 써대던 중년 여자와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맞고만 있던 젊은 여자. 얼핏 모녀 사이 같기도 했지만 행색이 너무 다른 스타일의 여자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부류 같기도 했다. 민정이와 친구들은 두 여자가 먹자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을 수군거리며 쳐다보다 즉석 떡볶이 집으로 향했다.


민정이와 친구들은 떡볶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능숙하게 주문을 하고선 본격적으로 이야길 이어갔다. 둘이 무슨 관계니, 누가 잘못했느니, 그 여자가 무섭게 생겼느니, 저 여자가 독하느니, 아무 것도 모르면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원래 이야기란 아는 게 없을수록 말할 게 많고, 말할 게 많을수록 재미있는 법이다.


평소라면 떡볶이에 국물 간이 베기도 전에 떡들이 다 사라졌을 터였지만 오늘은 국물이 한참을 졸아가고 있는데도 포크질이 느렸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걸 보고 왔을텐데도 각자 자기가 본 것에 대해 말해주느라 난리였다. 본인의 성적 이야기를 할 때도, 교내 청소 당번을 어떻게 정하는 게 효율적인 것인가에 대해 토론할 때도, 한 학년 아래 잘생긴 후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떡볶이 국물이 이 정도로 졸았던 적은 없었다. 누군지도 모를 여자 둘이 붙은 싸움에 대해 이들은 싸움 현장보다도 더 치열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일단 모녀 사이는 절대 아니야.

왜 나이대는 딱 맞지 않아?

아니지. 너 엄마가 혼내면 조용하게 맞고만 있냐. 절대 아니지. 딸이면 차라리 바락바락 대들지.

그럼 모녀가 아니면 그렇게 맞을 일이 뭐가 있어?

더 많지.

하긴 친딸이면 또 그정도로 때리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의붓딸인가?

근데 그 아줌마 생긴 것만 보면 왠지 친딸이라도 얄짤 없을 것 같던데.

나는 그 언니가 더 무섭던데. 그렇게 맞는데도 반항 한 번 안하고 아무렇지 않게 있는 거 봤어?

야, 아무렇지 않긴. 거의 울기 직전이었어. 너 서있던 위치에서는 그 언니 얼굴이 잘 안보였나보지. 엄청 참는 것 같던데.

근데 그 아줌마 말 들으면 잘못은 어린 여자가 한 것 같기도 하지 않아?

그건 맞은 쪽은 아무 말을 한 게 없으니까 우리도 모르는거지 뭐.

야, 자기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면 그 정도로 그렇게 맞고만 있다고? 헐. 아님 불륜 아니야? 소름.

무슨 막장 드라마야?

대낮에 길에서 그렇게 때리고 맞고 한 게 이미 막장인데 뭐.

근데 나도 그 언니가 좀 영악해 보이긴 했어. 진짜 만약에 그 어린 여자가 완전 호구처럼 엄청 착한 사람이라치자. 그럼 맞으면서 미안한 표정이나 불쌍한 표정이라도 지을건데, 그 여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있었대도? 완전 무감정. 난 약간 섬뜩하던데.

아니라니까.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니까. 그리고 때리던 아줌마 약간 우리 일본어 쌤 같이 생겼는데 성격 더러운 거 딱 봐도 각 나옴.

난 맞을만 한 짓을 했으니까 그렇게 맞고 있다고 봄.


결국 떡볶이 육수를 추가하고, 다시 끓여서 다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토론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오늘의 토론을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사건들이 모인다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려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그나마 글쓰기에 자신 있는 민정이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내용을 정리해 올리게 된 것이었다.






제목 : A대 앞 먹자골목에서 여자 둘 개싸움 (누구 잘못 같은지 투표 받음)


A대 근처 모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입니다.


제목 그대로 오늘 학교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싸움을 목격했는데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 것 같은지

친구들끼리 의견이 분분해서 물어보려고 합니다.


한참을 이야기해도 결론이 안나고 저희끼리 싸움이 날 지경이라

여기까지 올려 보네요.


(편의상 이제부터 음슴체 쓸게요.)


모의고사 날이라 학교 좀 일찍 마치고 친구들이랑 A대 먹자골목 지나는데

어른 여자 둘이 대낮에 살벌하게 싸우는 거 목격함

사실 싸움이라기 보다는 한 명이 일방적으로 때리고 한 명이 일방적으로 맞음

5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자가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를 엄청 소리지르면서 때림

(추측한 나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편의상 때린 여자는 아줌마, 맞은 여자는 언니라 하겠음)


아줌마가 언니 옷 찢기기 일보 직전까지 잡아 당기고 괴성 지르면서 때리는데

때리는 와중에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막장 드라마 대사를 시전함

이 대사는 같이 있던 친구들 모두 정확하게 들음

그 외 짧은 욕도 하고 대부분 위에 저 대사처럼 언니한테 분노하는 말들이었음


참고로 아줌마는 엄청 화려하고 꾸민 스타일이었음

드라마에 나오는 잘사는 집 사모님 같은 옷 입고

화려한 머플러도 하고 액세서리도 낄 수 있는 건 다 낀 느낌

(옷이랑 가방이랑 전부 고등학생이 봐도 다 알만큼 유명한 명품들)


언니는 완전 반대로 수수하고 무난무난한 스타일?

대체로 다 무채색이었고 슬랙스에 로퍼에

깔끔하긴한데 그렇다고 누추하거나 하진 않았음

요즘 유행하는 깔끔한 느낌의 여대생 스타일


그 언니는 일방적으로 맞는대도

반항도 안하고 사과도 안하고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욕 듣고 맞고만 있는데

그렇다고 울지도 않고 아픈 내색도 없고 쓰니가 느끼기엔 차갑고 무표정한 느낌

별 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음

엄청 심하게 일방적으로 맞는데 아파하는 소리조차도 안냄


그렇게 몇 분 때리고 맞다가 여자 둘이 다시 걸어가고

걸어가면서도 아줌마는 계속 욕하면서 뭐라고 하고

언니는 무표정하게 뒤에서 따라가고 그렇게 사라짐

그러면서도 둘이 끝까지 같은 길로 같이 감


이거 보고 나서 밥먹으러 가서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 것 같은지 말이 나왔는데

여기서 갑자기 애들끼리 말싸움 나서 토론하다가

막장 드라마같은 시나리오가 다 나옴


누가 가해자다 결론이 안나오고 하루종일 이야기하다가

어느 쪽 편이 더 많은지 투표 받으려고 옴


님들 생각은 어떰?

50대 아줌마 가해자 : 추천

20대 언니 가해자 : 반대



+ 목격한 거 최대한 상세히 적었는데 더 궁금한 점 있으면 댓글 받음


+ 댓글 추가 답변 (확인 후 업뎃 중)

- 언니 옷이 되게 수수한 편이라 몰랐는데 같이 있던 친구들이랑 계속 이야기하면서 찾아보니까 그 언니 가방이랑 신발도 다 명품이라고 하네요.

- 언니 표정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전 일단 그 언니 절대 피해자 같은 표정? 불쌍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당당한 느낌이었어요. (친구 한 명은 그 언니가 눈물나는 거 참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그 친구 한 명 빼고는 다 저처럼 느꼈다고 하네요.)

- 참고로 왜 신고 안했냐, 아무도 안 말렸냐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은데, 아줌마가 주먹으로 때렸다거나 흉기를 썼다거나 한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등이나 팔 쪽을 손바닥으로 때린 거고 (약간 엄마가 애들 엄청 심하게 혼낼 때랑 비슷한 정도?) 그리고 체격이 별 차이 없는 여자 둘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모녀 사이로 보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신고는 안 한 것 같습니다. 생명에 지장있다거나 위험해 보이는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베플 1)

이럴 때 보통 개쎄게 생긴 쪽이 욕먹는데 대개 맞고 있는 쪽이 개쎈 경우가 많음

베플 2)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대사 때문에 때린 분이 피해자일 걸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것 같은데요, 보통 이건 심리학 측면에서 볼 때 잘못을 저지르고도 잘못한 지 모르는 가해자들이 전형적으로 가지는 생각이죠. 젊은 여성 분이 평소 오랜 시간 가스라이팅을 당하셨다면 저렇게 맞고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베플 3)

관상 is 사이언스. 예전엔 사람 속 모른다고 하던데 요즘엔 그럴 것처럼 생긴 애들이 그렇게 함.


(익명) 베플 2 겁나 웃김ㅋㅋㅋㅋㅋㅋ 이게 저렇게까지 진지할 일인갘ㅋㅋㅋ

(익명) 그 현장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는데요, 저도 집에 가는 길에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일 것 같은지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의견 엄청 갈려서 우리가 싸울뻔했어요 ㅋㅋㅋ

(김지곤) 역시 인간들은 상상력이 풍부할 뿐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대단한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발달시켰네요. 한 가지 사건으로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니, 실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제가 최근 발표한 ‘#1100 리포트’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한데, 이렇게까지나 진실을 갈구하는 여러분의 관심을 그저 지나칠 수없어 약간의 정보를 전해드리면, 두 사람은 딸-모녀 관계도 아니고, 치정 사건도 아니며, 사이비 종교의…

(익명) 위에 김지곤님 뭔가요?? 진짜 알고 하는 말인가요???






누가 가해자일지 함께 열심히 추측하는 댓글, 또 다른 목격자의 댓글, 정신 나간 듯한 사람의 진위를 알 수 없는 댓글까지. 하나씩 읽고 답변을 더할 때마다 민정이는 그날 그곳에서 본 것에 대해 더 자세히 떠올려 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날의 장면에서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민정이는 단톡방으로 들어가 댓글에 달린 질문들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답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저마다 댓글에 댓글을 더해갔다. 그날 본 것에 대해 모두가 하나씩 정보를 더 덧붙일 때마다 그날의 장면은 민정이와 친구들로부터 곱절씩 더 멀어졌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둘의 이야기는 점점 더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50대의 때린 여자와 20대의 맞은 여자는 그날 그 시간 먹자 골목에 서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그날 그 시간 그곳에 없던 사람들의 입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SNS 유머 계정을 타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닐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민정이의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이윽고 모두가 아는 관심 없는 사건이 되어갈 것이다.






- 희로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