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모여, 딴 걸 같이 씁니다.
셋이 모여, 딴 걸 같이 씁니다.
내 삶에 가장 중요하지만 내가 결정하지 못한 것 중 하나는 이름이다. 난 내 이름 석자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인생의 반을 불리운 그 이름이 내 일부가 된 것 같아 바꾸자고 생각하면 퍽이나 이상하다. 그래서 사주집에서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 해도 그냥 바꾸지 않고 이름 석자를 고스란히 쓰고 있다. 그럴 싸하게 말해봤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귀찮음이다.
이름 석자 중에 가장 싫었던 자는 성(姓)인 현(玄, 검을 현)이다. 단점까지 꼭 나와 닮은 아빠에 대한 반항심이었는지, 모르는 새에 나를 玄가에 얽매어 버린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검다는 뜻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이름 석자 중에 가장 싫은 글자는 하필이면 내가 바꿀 수 없는 글자였다. 내 선조는 오색찬란한 많은 색깔 중에 왜 하필 검은색을 택했을까. 그 글자는 때때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이 어두운 나 같기도 하고, 때때로는 속이 검은 나 같기도 했다. 내가 바꿀 수 없지만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검은 성에 대한 미운 감정은 꽤 오래 이어졌다.
어느 해의 방학 숙제로 <도덕경>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미션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이게 무슨 새 날아가는 소리인가 싶었던 도덕경. 그 내용은 대체로 잊었지만,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玄이라는 글자에 대한 해석이다. 노자에게 玄이란 머리 위의 무한한 공간인 우주이고, 알 수 없는 깊이이자, 만물의 기원이면서, 비어있는 것인 동시에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玄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고민을 해보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내 성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저 먼 옛날의 현자가 얘기한 그 의미에 대해서 곱씹어 본다. 나의 어둠. 내가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어떤 것. 무엇이 존재할지 알 수 없는 나의 깊은 곳. 내 안의 한없이 공허한 공간. 내가 싫었던 것은 사실 내 깊은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서른이 넘어서야 주저하지 않고 [ My name is 현 ]이라고 말하게 될 수 있는 지금, 나는 “현”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의 틀을 빌어 스스로가 외면했던 나를 끄집어 내려 한다. 그것이 오색찬란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떠한가. 효와 희가 또 다른 색의 이야기를 펼쳐 줄테니 나는 여기에선 기꺼이 현이 되어 보련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나는 얼마나 어수룩했던가. 씩 웃으며 어항을 넘어뜨리던 아이의 개구진 표정, 작은 손에 쥔 과자를 포악스럽게 가져가던 손들, 포효하듯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분노, 작은 생명체를 꾹꾹 눌러죽이던 손가락, 누군가를 향한 발길질. 나는 무방비의 상태로 세상의 폭력을 목도했다.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꽤 아팠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이야기 속으로 도망을 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느 먼 나라의 이야기, 소녀와 소년의 모험담, 현실과 환상이 적절히 버무러진 세상 속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전감을 느꼈다. 이 순진한 거짓말의 세계에 있는 한 나는 그 무엇에게서도 상처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이야기의 어떤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면 언제든 책을 덮고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 점이 퍽 좋았다.
이야기 속에서만 머무를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거짓말로 가득 찬 세상에서 거짓말 재료들을 수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내 안에 거짓말들이 쌓일수록 세상을 사는 것이 좀 더 수월해졌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도 거짓말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진실은 기대보다 날카롭고 잔인하지만, 거짓말은 달콤한 완충제가 되어 나와 타인을 동시에 보호해준다. 그러니 나의 거짓말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제법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좀 더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거짓말에 진실을 섞을 줄도 안다. 거짓말의 비율이 높으면 소설이 되고, 진실의 비율이 높으면 수필이 된다. 물론 그 무엇도 완전한 순수는 없다. 때로는 보다 견고하고 단단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다른 거짓말쟁이들과 작당을 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거짓말 조각들을 모아 꿰매면 완전히 새로운 거짓말의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다.
오랜만에 만난 A와 길을 걷다가 그보다 본 지 더 오래된 A의 친구 B를 만났다. 나는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그 사이가 어색해 괜히 얼굴을 붉히며 B에게 “안녕”하고 수줍게 인사했다. B와 헤어진 후 A는 내게 “넌 오랜만에 봤는데도 어색함 없이 굉장히 반갑게 인사를 한다”고 했고, 훗날 B는 A에게 “걘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좀 차갑게 대하더라”고 말했다. 우리 셋은 그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고 서로 다른 말을 했지만 그중 무엇 하나도 거짓은 없었다. 아마 우린 또 언젠가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한 치의 거짓 없이 각자의 진실을 말하겠지. 그렇게 서로의 진실은 거짓이 되겠지. 말들은 돌고 돌며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할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누군가의 입장이라도 일단 써 내려가 보려고 한다.
대부분 나이지만, 때로는 A, 때로는 B의 이야기를.
나를 탐험하는 현과 거짓말쟁이가 되기로 결심한 효와 누군가의 진실을 말하는 희가 만나 각자의 시선으로 글을 쓴다. 우리 셋은 때로는 현/효/희로서, 때로는 하나의 즐거운 ㅎㅎㅎ로서, 같은 소재, 주제, 배경으로 글을 쓰고 엮고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