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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기 Jun 16. 2023

[상황 제시] | 호수

나는  계속 잠에 들지 않은 채 그저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다.

| 상황제시 |


나는 누워 있다. 방은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 차 있다.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째각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계 초침 소리 뿐이다. 

불을 하나도 켜고 있지 않아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방안 곳곳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바깥에서 흘러오는 빛에 슬쩍 보이는 시계는 어느 덧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다.

잠에 들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3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누워서 TV를 켜거나 스마트폰 창을 바라봐도 되련만, 굳이 누워서 뒤척이며 방 안을 둘러본다.


깨끗이 정리된 가구들도 어렴풋이 보인다. 

나는 구석에 침대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침대 가운데 대자로 누워있다. 

이불은 따로 덮지 않는다. 

그럼에도 날은 덥고 방 안은 습기가 차 있다. 누워있는 침대조차 눅눅한 기분이다. 


나는 가만히 천정을 본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창 밖에서 방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잠에 들지 않는 나는 이따금씩 지나가는 헤드라이트가 반가워 가만히 천정을 들여다 보기만 한다.

나는 계속 잠에 들지 않은 채 그저 천정만을 쳐다보고 있다.



<호수> 


한밤중인데도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듯 숨이 막혀온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살갗에 이불보가 찐득하게 달라 붙는 기분이 든다.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바깥의 소음마저 끈적이는 느낌이다. 깊은 잠에 들어 이 기분 나쁜 끈적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잠에 전혀 들고 싶지 않기도 하다. 잠에 들어버리면 미지의 공포에게서 쉽게 도망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비합리적인 것이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의식을 붙잡기 위해 어정쩡한 애를 써본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똑바로 감각할 수만 있다면, 정도를 지나친 습도 따위야 아무렴 괜찮다. 


나는 바로 누운 채 천정을 바라 본다. 얼룩덜룩한 천장에 희미한 불빛이 비쳐 마치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언젠가 보았던 비슷한 일렁임을 떠올린다. 그 때도 지금처럼 더운 여름밤이었다. 나는 당시 교제하던 사람과 함께 어느 낯선 동네의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애인은 호수가 가뭄이나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인공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호수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사실 호수를 보았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물과 땅의 정확한 경계를 알기 어려웠다.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탓에 도시의 불빛은 아주 드물게 흘러들어와 호수의 일부를 비춰줄 뿐이었다. 그러니 내 망막에 비친 시컴한 상이 호수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호수를 보았다기보다 호수라고 추정되는 검은 배경에 시선을 멈추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호수를 볼 수 없었지만, 애인은 휴대폰 지도 어플을 켜고 인공위성이 찍은 호수의 모양이 길다란 타원 모양임을 보여주었다. 


지도에 따르자면, 호수의 허리를 가로질러 양 뚝방을 이어주는 길이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타원형의 호수가 아니라 알파벳 D 모양의 호수 두 개가 서로를 등지고 있는 셈이었다. 애인은 눈을 반짝이며 이 길을 건너가보자고 했다. 나는 그가 이런 순간조차에도 그의 성질이 투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했지만, 이 호숫가에서 시간을 때울만한 마땅한 거리도 없기에 군말 더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호수를 가로지는 길이 나왔다. 1m가 조금 넘어보이는 좁은 폭의 흙길이었고, 양 가장자리에는 나무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사람이 자주 다니지는 않는지 길게 자란 수풀이 나무 울타리를 거진 가리고 있었다. '저기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 가면 될거야.' 애인은 반대편 호숫가 가로등이 희미한 불빛을 손으로 가키며 말했다. 길이 아주 좁지는 않았지만 가장자리에 길게 자란 풀 때문에 종아리가 따끔거려 최대한 중앙으로 걷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건 애인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이내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애인이 나보다 한 걸음 앞장 서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랐다. 덕분에 거미줄이나 날벌레 등이 애인의 몸에 막혀 내 얼굴로 덜 들이닥쳤다. 대신에 앞만 보고 이야기하는 애인의 목소리가 풀벌레들의 거센 울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애인은 자신의 말소리가 나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쉬지 않고 떠들었고, 애인의 목소리는 마치 주파수를 제대로 맞추지 않은 라디오 소리처럼 드문드문 들렸다. 말의 내용을 알 수 없는 탓에 건조한 노랫가락같기도 했다. 나는 그 지루한 음율에 의미 없는 추임새를 얹으며, 애인의 뒷통수를 보았다가 등을 보았다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어깨를 보았다가 내 발끝과 그의 발뒷꿈치를 보며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타원형으로 놓인 가로등 불빛 중 그 어느 것도 가깝지 않은 지점, 그러니까 아마도 길의 한가운데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오른쪽 발목에서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처음에는 모기에 물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증을 무시하고 걸음을 계속했으나 점차 발목이 후끈거리며 부어오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재빨리 만져보니 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나는 급하게 애인을 불러세웠다. 애인은 내 부름을 바로 듣지 못하고 몇 걸음을 더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애인은 오른쪽 발목을 쥐어싼 채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서 있는 나를 보고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뭔데 그래. 애인이 비춰준 핸드폰 플래쉬로 살펴보니 오른쪽 복숭아뼈 윗쪽 부근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아마도 무언가에 물린 듯한데, 심상치 않은 뜨거운 열감과 심한 가려움이 느껴졌다. 애인이 비춘 핸드폰 불빛과 내 발목 사이의 공간으로 날벌레들이 쉬지 않고 날라왔다가 사라졌다.  


나는 혹시라도 독성이 있는 무언가에 물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애인은 핸드폰 플래시를 끄고는 일단 가자고 말했다. 그거 말고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그의 등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목이 삔 것도 아닌데,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똑바로 걷기가 어려워 어느 순간부터는 발을 절며 걸었다. 여전히 수풀이 우거져있어 내 몸을 사락이며 스쳤다. 나는 다리에 풀 날이 스쳐 혹시라도 물린 자리가 덧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애인은 앞장 서서 걷다가 수시로 고개를 돌아보며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앞을 보며 걸을 때에는 나와의 거리가 성큼성큼 멀어졌다가, 뒤를 돌아 잠시 멈춰 설 때에는 거리가 가까워졌다. 절룩이며 걸어 오는 나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다시 가까워졌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앞을 보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어둠에 가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기다려주는 그의 표정이 눈에 그려졌다. 미간을 약간 찌뿌린 채 적잖히 못마땅해하는 표정. 나는 그를 짜증나게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평소에도 빠른 그의 발걸음을 따라잡긴 쉽지 않았다. 종종거리면서 동시에 절룩거리는 스스로가 곤혹스러웠다.  


더딘 속도 때문에 목적지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갑자기 애인이 우뚝 멈춰서 등을 내밀며 말했다. 차라리 업혀. 애인의 널직한 등을 보며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제 통증에도 익숙해져 처음보다는 훨씬 걸을만 했고, 애초에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에게 업힌다는 것이 민망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의 등 뒤에 업혀본 적이 없었다. 나는 괜찮다면서 사양했다. 그러나 애인은 자꾸만 뒤쳐지는 나를 기다리느니 나를 업고 이 길을 빨리 건너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확고하게 선 것 같았다. 그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등을 들이밀었고 내가 업히기 전까지는 꼼짝도 안할 기세였다. 나는 차마 그 거대한 등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가슴을 애인의 등에 엉거주춤 갖다대었다. 애인은 어정쩡한 위치에서 흔들리는 나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목에 두르고는 나의 엉덩이를 깍지 낀 손으로 받치며 일어났다. 애인이 일어나면서 몸을 휘청이자, 동시에 나의 몸도 휘청거리면서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났다. 그는 나의 엉덩이를 꽉 쥔 채 한 걸음,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애인의 원 걸음보다는 느리고 나의 걸음보다는 빠른 속도로. 오른발, 왼발을 내딛을 때마다 내 몸이 오른쪽, 왼쪽으로 갸우뚱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애인과는 섹스도 하는 사이지만, 애인의 등에 나의 가슴이 완전히 밀착되는 것은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나는 그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썼고, 그 때문에 나의 몸은 애인의 등 뒤에서 더욱 불안정하게 흔들거렸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을 때, 우리는 여전히 분간할 수 없는 호수의 한 가운데 있었다.  


풀벌레 소리는 여전히 우렁차 귓가를 가득 메웠다. 애인이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나는 기우뚱하는 몸의 궤적을 따라 시커먼 호수에 던져질 것만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애인에게 내려달라고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애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나의 몸은 여전히 애인의 등 뒤에 꽉 붙어 있었다. 애인의 등에게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겐 도망칠 수 있는 발이 없었다. 나는 땅에 닿지 않은 발을 계속해서 흔들었다. 벌레 물린 발목은 점점 더 부어올라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독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길의 끝에 닿기도 전에 독이 퍼져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길의 끝에 영영 다다르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보이는 것은 애인의 시커먼 뒷통수 뿐이다. 계속해서 발버둥쳤다. 애인의 목을 잡고 흔들며 다리를 사정 없이 걷어찼다. 그리하여 애인이 뒤를 돌아봤을 때..... 


나는 눈을 번쩍 뜬다. 눈을 번쩍 떴을 때 다리가 허공을 가르며 헛발차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꿈벅인다. 일렁이는 천장을 빤히 바라보다가 두 팔이 이상하게 저릿저릿함을 깨닫는다. 팔들은 베개 위로 자유분방하게 뻗쳐있다. 차렷 자세를 하자 비로소 손끝까지 피가 도는 느낌이 난다. 나는 눈을 뜬 채로 일렁이는 천장을 바라본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잠이 얼핏 들었던 모양인데 영 잔 것 같지가 않다. 방금 꾸었던 꿈에 대해서 생각한다. 누군가의 등 뒤에 업혀 있었고 사방이 어두운 공간이었던 것 같다. 나를 업었던 사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해서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멀리 멀어져간다. 그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밀어내는 것을 택한다. 핸드폰을 보니 새벽 3시가 훌쩍 넘어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모로 눕는다. 눈을 꼭 감는다. 이불 대신 축축한 공기가 내 몸 위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한 차례 더 몸을 뒤척여 자세를 바꾼다. 나는 이제 코를 베개에 박은 채 저 바닥으로 다이빙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숨이 막혀오지만 자세를 또 바꾸면 그나마의 잠이 달아날까봐 일단은 참아 본다. 아주 멀리서 에어컨 실외기가 탈탈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저 깊은 잠을 자고 싶다. 


끈적한 습기에 숨이 막힐 듯한, 지독한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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