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t information의 힘
뉴욕의 산재보험 제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청구인과 보험사의 치료와 보상 문제를 중재하는 행정 법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퀸즈,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 화이트 플레인즈에 한 개씩 있고 롱아일랜드에는 몇 군데가 있습니다. 청구인과 보험사는 치료와 보상 문제를 두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행정 법원의 행정 판사가 “히어링 hearing”이란 절차를 통해 청구인과 보험사 간의 갈등을 해결해 갑니다. 히어링이 잡힐 때마다 행정 판사의 집회 하에 청구인과 청구인 쪽 변호인, 보험사의 변호인이 출석합니다. 과거에는 법원 서기도 함께 히어링에 출석했으나, 최근 몇 년 전부터 법원 서기는 사라지고 대신 녹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사건 하나마다 히어링이 한 번 내지 수 번 잡힐 수 있습니다. 사건이 복잡할수록, 해결해야 할 이슈가 많을수록 그 히어링의 수는 늘어납니다. 행정 판사의 판결은 청구인과 보험사 양 당사자를 구속하는데, 판결에 불만을 품은 당사자는 판결 후 30일 내에 항소할 권리도 있습니다.
히어링은 우리말로 “공청회” 정도가 될 것입니다. 히어링은 문자 그대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즉 행정 판사가 쟁점이 되는 이슈마다 청구인과 보험사 각자의 입장을 듣고 판결한다는 것이 취지입니다. 저는 여기서 왜 “씨잉 seeing” 이란 말을 안 쓰고 “히어링”이라는 말을 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청구인과 보험사는 서로 자신의 입장을 행정 판사가 믿도록 만들어야 하므로, 씨잉이 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지요.
인간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고, 어느 특정 주파수 (20~20,000 헤르츠) 사이의 소리만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소리들에 반응해야 하는 경우 인간의 뇌가 너무 피로해질 수 있는 까닭에 딱 생존에 필요한 소리만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청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의 목소리를 인지하는 경우에 가장 적은 에너지를 쓰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인간은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각 또는 청각을 잃은 사람이 있을 경우, 시각을 잃은 사람이 청각을 잃은 사람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각을 잃은 사람이 시각을 잃은 사람보다 더 불행하다고 합니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던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Blindness separates us from things, but deafness separates us from people. (시각을 잃은 것은 사물과의 단절이지만, 청각을 잃은 것은 사람들과의 단절이다.)”
심리학자들은 시각을 가리켜 “dry information”이라고 하는 반면 청각은 “wet information”라고 합니다.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고막이 소리에 반응하여 울리기 때문인데, “울림”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청각은 시각보다 감정에 더 호소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심지어 이런 실험까지 해보았다고 합니다. 실험 당사자들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데, 첫 번째 집단에는 포르로의 시각, 음성 정보 모두를 보여주고, 두 번째 집단에는 시각 정보만, 세 번째 집단에는 소리만 들려준 후 세 집단 중 어느 집단이 가장 성적으로 흥분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소리 정보만 들은 집단이 가장 흥분했다고 합니다. 이 집단은 포르노의 소리를 들으면서 앞의 두 집단보다 많은 것을 상상했던 것이지요. 고성이 오가는 정치인들의 청문회 장면을 우리는 뉴스로 종종 접하는데, 청문회 장면을 시각으로만 보여준 집단보다 라디오로 청문회를 접한 집단이 더 흥분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어 시각 정보보다 청각 정보가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히어링에서 청구인을 대변할 때 이런 청각 정보의 힘을 십분 발휘합니다. 강조를 해야 할 때는 음성에 힘을 주고, 연민을 자아내어야 하는 시점에서는 목소리에 살짝 떨림을 더합니다. 행정 판사의 집중을 요구하는 포인트에서는 더욱 또박또박 말하기도 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빨리 말하면서 강약 조절을 하는 것이지요. 시각 정보는 그 정보를 찾는 당사자가 직접 포인트를 찾아야 하지만, 음성 정보는 그 정보 전달자에게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청구인과 보험사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법리에 근거를 두고 판결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 당사자의 법리 해석이 충돌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그리하여 각자에게 유리한 증거에 행정 판사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시각보다는 청각이 훨씬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법원 절차가 “씨잉”이 아닌 “히어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인 것 같습니다.